인구 270만명인데 레이저 기업 60개…반도체 기술 강소국 비결
[월간중앙] 스페셜 리포트 | 반도체 생산국 넘보는 유럽의 ‘레이저 스쿨(School)’…반도체 기술 강국, 리투아니아를 가다
270만 소국에 60여 개의 레이저 기업 경쟁… 극초단 펄스 레이저 선도국
성공 비결은 산학 협력, 자유로운 스타트업 분위기 속 미래 연구자 양성
인천국제공항에서 12시간 떨어진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 도착했을 때 처음 만난 풍경은 한눈에 들어오는 아담한 공항이었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 묘사된 풍차가 어울릴 법한 평온한 도시였다. 공항에서 호텔로 향하는 버스 운임은 1유로(약 1400원)였다. 동전을 내고 버스를 탔다. 어린 시절 모습 같아 정겨웠다.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는 동화 속 한 장면이었다. 돈키호테가 말을 타고 달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평온함이 도시에 깊이 배어 있었다. 강변을 달리는 버스는 서울의 여느 시내버스와 달리 두런두런 말소리 하나 없었다.
인구 270만 명의 작은 나라 리투아니아는 세계 첨단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레이저 기업들이 그 주인공이다. ‘광선빔’으로도 불리는 레이저의 최대 장점은 ‘정교한 가공’이다. 리투아니아는 특히 피코초(Picosecond, 1조 분의 1초) 단위 레이저 시장에서 세계 시장의 절반을 점유하고 있다. 레이저는 반도체 제조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기술이다. 실제 한국 기업들도 리투아니아의 극초단 펄스(ultra-short pulse) 레이저를 사용한다.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레이저 가공기는 펄스 폭에 따라 크게 ‘나노초 펄스 레이저’와 ‘극초단 펄스 레이저’로 나뉜다. 극초단 펄스 레이저에는 피코초와 펨토초(Femtosecond, 1000조 분의 1초)가 있다. 극초단 펄스 레이저의 장점은 나노초 펄스 레이저에 비해 초정밀 가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리투아니아를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인 ‘텔토니카(Teltonika)’도 자국 레이저 기술을 사용한다. 사물인터넷(IoT) 시장을 선도하는 텔토니카는 지난해 대만산업기술연구소(ITRI)와 함께 반도체 기술 개발에 나선다고 발표해 업계 이목을 끌었다. ITRI가 개발한 반도체 제조 기술 및 장치에 대한 라이선스를 텔토니카 측이 획득할 수 있다고 발표해 화제가 됐다. 당시 외신에선 리투아니아가 조만간 레이저 기술 제공에 그치지 않고 반도체 생산국 반열에 올라설 것이란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반도체 매개로 대만 정부와 더 밀착
리투아니아를 대표하는 사물인터넷(IoT) 기업은 어떤 모습일까? 빌뉴스 도심에서 차로 10여 분 떨어진 텔토니카 본사 입구에 들어서자 웅장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너편에는 아직 공사 중인 대형 건물의 외벽이 보였다. 기자를 안내한 비아세스레이 자로세비치(Viačeslav Jaroševič) 텔토니카 아시아총괄은 “대지면적 5만㎡의 반도체 시설을 마련하기 위해 5억 유로(약 7000억원)를 우선 투자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사업장을 확장하는 속도가 수요를 못 따라가고 있는 실정”이라며 “반도체 레이저 수요 증가에 힘입어 텔토니카의 성장 속도가 가파르다”고 귀띔했다.
텔토니카 아시아총괄에게 텔토니카와 ITRI의 협력 상황에 대해 물었다. 그는 “ITRI와 체결한 기술 협력 계약은 크게 세 단계로 구성된다”며 “지난해 첫 단계인 ‘타당성 조사’를 했다. 반도체 설계, 제조, 조립, 테스트 및 전력 모듈 생산을 위한 타당성 조사”라고 설명했다. 그는 텔토니카의 궁극적인 목표가 레이저 기술 제공을 넘어 반도체 생산이란 점을 재차 확인해주었다.
최근 리투아니아와 대만 정부 간 밀착도 텔토니카와 ITRI의 협력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현재 빌뉴스에는 타이베이(Taipei) 대표부가 아닌 대만(Taiwanese) 대표부가 설립돼 있다. 이를 두고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어긋난다며 강력 반발했고, 급기야 중국은 지난 2021년 11월 리투아니아와 외교관계를 기존 대사급에서 대사대리급으로 격하했다.
현재 텔토니카-ITRI의 계약 규모는 1400만 유로(약 205억원)에 이른다. 이 중 1000만 유로는 대만 외교부에서, 400만 유로는 텔토니카 측에서 부담한다. 양측은 반도체 설계, 제조, 조립·테스트, 전력 모듈 제조 등 4개 프로젝트에 대한 세부 계획을 세웠다. 향후 반도체 동맹인 ‘칩4(한·미·일·대만)’와 유사한 반도체 동맹을 리투아니아와 대만이 염두에 둔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빌뉴스대학은 산학협력의 모범
회사 정문을 나서 ‘빌뉴스대학’으로 향했다. 세계적인 레이저 기업의 산실인 대학의 레이저연구센터(Laser Research Center)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다. 빌뉴스대학은 리투아니아는 물론 중·동부 유럽의 명문으로 꼽힌다. 특히 1982년 설립된 빌뉴스대 레이저연구센터는 수많은 레이저 기술자를 배출한 ‘레이저 스쿨’이다.
빌뉴스대 정문에 들어서자 연구센터장 달리아 카스켈리테(Dalia Kaškelytė) 교수가 반갑게 맞이했다. 보통 연구실 하면 연상되는 딱딱한 분위기와는 달리 자유로운 스타트업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대학원생들은 지도교수와 마주 보고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한 박사과정 학생은 기자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반갑다”며 유리 조각에 기자의 이름을 레이저로 적어주기도 했다.
기자에게 대학 현황을 설명하던 비타우타스 주크나(Vytautas Jukna) 교수는 “라이트컨버젼 대표이사도 이곳에서 레이저를 연구하며 꿈을 키워 나갔다”며 “이처럼 빌뉴스대의 산학협력은 훌륭하다. 박사과정 학생이 기업체에 파견근무를 나가는 등 학교와 기업의 소통이 원활하다. 윈-윈 선순환 구도”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어 “성공적인 산학협력은 자연스런 인재 리쇼어링을 낳고 있다”고 했다. 해외 유학 중인 리투아니아의 인재들이 귀국길에 오르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앞서 마르티나스 발카우스카스 라이트컨버젼 대표이사가 대표적이다. 빌뉴스대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그는 네덜란드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리투아니아의 우수한 산학협력 시스템과 연구소에서 근무하기 위해 다시 빌뉴스대에 들어와 박사학위 공부를 했다.
“인재 ‘리쇼어링(Reshoring)’ 비결이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동행한 라이트컨버젼 대표이사는 빌뉴스대가 보유한 훌륭한 시설을 꼽았다. “빌뉴스대의 물리학 실험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레이저 장비를 갖추고 있다. 그게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다”라고 말했다. “박사과정을 밟을 때만 해도 이렇게 라이트컨버젼 대표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며 웃어 보인 그는 “대학원생 시절 회사가 빌뉴스대 건너편에 위치해 있어 학교를 오가기가 편리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의 협력에 최적”
마지막 일정으로 리투아니아 레이저협회(LLA)를 찾았다. 레이저협회 게디미나스 라시우카셔스(Gediminas Račiukaitis) 회장은 기자를 보더니 “반도체 강국 한국에서 손님이 왔다”며 반가워했다. 라시우카셔스 회장은 “리투아니아는 극초단 펄스 레이저에서 전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며 “한국의 삼성전자, LG전자, SK하이닉스 등과 협력하기에 최적”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270만 인구의 리투아니아에 60여 개의 레이저 기업이 경쟁하고 있다. 대다수 기업가는 빌뉴스대에서 레이저를 공부한 이들”이라며 리투아니아의 성공 비결로 산학협력을 꼽았다.
- 리투아니아 빌뉴스=김태욱 월간중앙 기자 kim.taewook@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60만원 다이슨 베끼고 당당하다…'4만원 짝퉁'의 노림수 | 중앙일보
- "윤아도 당했다" 경호원 이 행동…칸영화제 인종차별 논란 | 중앙일보
- 헤어진 불륜녀에 “집 주겠다”…남편의 유언 못 막는 까닭 <下> | 중앙일보
- 차두리, 두 여성과 '내연 문제 고소전'…"아내와는 13년째 별거" | 중앙일보
- 친구 머리에 봉지 씌워 폭행…소변·정액까지 뿌린 10대들 | 중앙일보
- "호중이 형, 경찰 X밥 아냐…변호사가 안 알려줬어?" 경찰글 화제 | 중앙일보
- [단독] 90%가 살충제 뚫었다…말라리아 '좀비 모기' 공포 | 중앙일보
- "아들이 먹던 김밥서 칼날 나와…항의했더니 진상 취급" | 중앙일보
- '파묘' 정윤하, 암 투병 고백 "1년 지나 재발…더 많은 생각 든다" | 중앙일보
- 박명수도 "남 가슴에 못 박지 마"…구독자 18만 날린 피식대학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