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 아버지'의 본모습... 마지막까지 뻔뻔했던 '장 목사'

이준목 2024. 5. 24.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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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이준목 기자]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2012년 '원주 사랑의 집 사건'은 미인가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벌어진 희대의 장애인 인권유린 사건이었다. 대외적으로는 21명의 아이들을 돌보는 천사 아버지의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 실체는 수많은 장애인과 아이들을 착취하고 학대했던 악마였다. 그가 진정 소중하게 여겼던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돈' 뿐이었다.

'사랑의 집'은 왜 그 이름이 무색하게 '죽음의 집'이 되어야만 했을까. 5월 23일 방송된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천사 아버지의 비밀'편을 통하여 가해자 장씨의 행적과 장애인 인권유린의 충격적인 현실을 조명했다. 

2012년 5월 27일 원주의 한 대형병원, 10년 넘게 병원의 냉동고에 장기 보관 중인 한 구의 시신이 있었다. 고인의 이름은 장성희로 10년 전 사망 당시 나이는 32세였다. 병원 직원은 아무런 연고없이 차가운 냉동고 안에 방치된 성희씨를 가엾게 여겨서 일면식도 없음에도 매년 그녀의 제사를 치러줬다고 한다.

그런데 인근 병원에서도 비슷하게 오랫동안 방치된 냉동 시신이 하나 있었다. 성희씨보다 더 오래된 12년이나 지난 시신의 이름은 장성광, 놀랍게도 성희씨와는 친남매 사이였다. 세월이 오래 흘러 시신은 이미 미라가 된 상태. 통상적으로 병원에 이렇게 장기간 방치된 경우는 드문 일이었다.

병원 직원들은 정보를 공유하다가 두 고인이 남매이고 보호자가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병원 측에서 몇 번이나 연락을 취했지만 정작 보호자라는 인물은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장례를 치를 의지가 없었고 병원 측의 방문조차도 극구 거부했다.

냉동시신 사건이 알려지면서 SBS의 시사 프로그램 제작진이 취재에 나섰다. 의외로 보호자는 친절한 모습으로 취재진을 맞이했고, 자신을 '장 목사'라고 소개했다.

천사 아버지로 알려진 '장 목사'의 실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장씨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을 입양해 키운다는 '천사 아버지'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다. 장씨는 원주에서 복지시설 '사랑의 집'을 운영하며 그가 데려와 키웠다는 아이들의 숫자는 무려 21명에 이르렀다.

장씨는 경제적 어려움과 재개발로 인하여 한동안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다른 시설로 보내야 했고, 형편이 나아질 때마다 헤어진 아이들을 조금씩 다시 데려오고 있다고 해명했다. 또한 장씨는 사망한 성희-성광 남매의 시신을 인수하여 장례를 치르지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해당 병원들이 남매의 '의료사고'에 대한 책임을 은폐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진실을 밝히는 게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제작진은 취재 과정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하고 의구심을 품게 됐다. '사랑의 집'은 넓은 부지에 비하여 자녀들의 거주공간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제작진은 움막같이 지어진 초라한 건물에, 5월임에도 방바닥은 발에 한기가 느껴질 정도의 냉골이었고, 방안에서는 알 수 없는 악취가 날만큼 위생이 엉망이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원생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삭발에 트레이닝복 차림이었고 팔에는 자신의 지체장애 등급과 연락처가 마치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제작진은 병원을 찾아 성희씨 남매의 사망원인을 추적했다. 병원 측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남매는 병원에 실려오기 전부터 영양실조와 욕창 등으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다. 병원 측이 치료를 위하여 보호자에게 여러번 연락을 시도했지만 받지 않았다고 한다. 남매는 결국 치료시기를 놓쳐서 병원에서 사망한다. 장씨는 병원 측이 무료로 장례를 치러주겠다는 제안도 거부하고 뒤늦게 의료사고를 주장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어 제작진은 장씨가 아이들을 보내야 했다는 시설들에 직접 확인을 해봤다. 하지만 그러한 아이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장씨가 제작진에게 제시한 아이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은 조작된 합성사진으로 드러났다. 또한 장씨는 동일인물을 이중삼중으로 출생신고를 해놓고 시로부터 장애연금을 부정수급해온 것까지 탄로났다. 장씨는 성희씨가 사망한 후에도 2년간이나 그녀의 이름으로 수급을 받기도 했다.

의심이 점점 짙어지던 중, 한 시설에서 장씨의 자녀를 찾았다는 제보가 전해졌다. 과거 '사랑의 집'에서 장씨와 지냈던 상수(가명)씨는 "장씨가 자녀들을 상대로 수시로 학대하고 폭행과 고문을 가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폭로했다. 상수씨는 당시를 "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며 몸서리를 쳤다. 그는 중증 장애인이었지만 인지 능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진술의 신빙성이 높았다.

제작진이 다시 장씨를 찾아가 진실을 추궁하자 비로소 그는 가면을 벗고 본색을 드러냈다. 장씨는 출입구를 닫아걸고 화를 내며 인터뷰를 거부했다. 성희씨 남매의 시신을 방치하는 이유에 대하여 "내 자식이 죽었다고 생각 안 한다"고 억지를 부리는가하면, 오히려 경찰에 신고하여 제작진을 사기 치는 공갈협박단으로 비하하는 폭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장씨는 제작진과 함께 경찰서에 가서도 돌발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장씨는 제작진의 얼굴을 카메라로 찍어놓고, 제작진이 돈을 요구하면서 협박을 했다고 주장했다. 제작진의 거듭된 팩트 추궁에도 장씨는 시종일관 모르쇠로 일관하며 억지를 부렸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2012년 6월 8일, 오랜 시간 세상에 감춰둔 장씨의 비밀이 마침내 방송을 통하여 세상에 공개됐다. 방송을 보고 경악한 시청자들 중에는 재활치료를 해준다는 장씨의 말만 믿고 아픈 가족을 맡긴 사람들도 있었다. 피해자 가족들은 장씨가 아이들을 데려가놓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놀랍게도 병원에 시신으로 장기간 방치되어 장성광씨의 본명은 이광동씨였다. 어머니 조영실씨는 유전자 검사를 통하여 이광동씨와 모자관계임이 확인됐다.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아들의 모습을 보며 영실씨는 가슴 아프게 통곡했다.

광동씨는 세상을 떠난 지 무려 12년 만에야 자신의 이름을 찾았지만, 아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법적 보호자는 아직 장씨로 되어있었기에, 그의 동의가 없으면 광동씨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장씨에게 아이들을 맡겼던 피해 가족들이 찾아가 항의했지만, 장씨는 무조건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뻔뻔한 대응으로 일관했다. 심지어 장씨 부부는 오히려 피해 가족들과 인권단체 회원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적반하장을 저질렀다. 직원들은 대화도 상식도 전혀 통하지 않는 장씨 부부의 만행을 지켜보며 "우리한테도 이러는데 몇십년을 같이 사신 분들에게 어떻게 했을까는 생각이 들었다"며 씁쓸해했다.

피해 가족들은 대부분 가난한 환경에서 장애아이들을 돌볼 만한 여력이 없던 상황이었다. 아이들이 학대 당한 데 분노를 표시하는 가족들에게 "그럼 왜 아이들을 버렸나"는 장씨의 뻔뻔한 조롱은, 피해자들의 상처를 두 번 헤집는 비수가 됐다.

원주 가정폭력상담소와 장애인단체들은 힘을 합쳐 '사랑의 집'에 갇혀있던 원생들을 구출하여 장씨와 분리시켰다. 원생들은 장씨에게서 해방된 데 안도하며 모처럼 밝은 웃음을 되찾았다. 사망한 광동씨 역시 법원의 결정으로 인하여 신원이 회복되며 뒤늦게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장씨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돈이었던 것"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한편 사건을 조사하면서 더욱 놀라운 사실들이 연달아 밝혀졌다. '사랑의 집'은 그동안 미인가 시설이라는 이유로 행정기관의 조사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제도와 관심의 철저한 사각지대 안에서, 원생들은 서류상 숫자를 유지하기 위하여 성별과 이름조차 제멋대로 끼워맞춰져 있었다.

전문가는 "장애인 한 사람당 몇십만 원씩 국가에서 보조해주는 지원금이 나온다. 장씨에서는 그게 고정 수입이었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돈이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상진(가명)씨는 17세에 '사랑의 집' 학대를 피해 탈출한 뒤 줄곧 숨어지내왔다. 상진씨는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고 사건이 밝혀지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끝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도 있었다. 상진씨의 증언에 따르면, 장씨는 아이들을 학대하고 폭행하여 사망하면 시신을 쓰레기 봉투에 담아 땅에 유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매장 추정지에서는 2004년 재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공사중 일곱 구의 무연고 유해가 발견됐지만 신원을 파악하지 못하고 화장처리된 상태라 실종자들의 행적은 묘연했다.

장씨의 악행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경찰과 국가인권위도 수사에 나섰다. 분노한 국민들은 집회를 열어 장씨에 대한 엄중한 처벌과 진상조사를 촉구했다. 장씨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뜬금없이 췌장암을 호소하며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 동정을 호소하는 기행을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법원이 장씨에게 내린 판결은 고작 징역 3년 6개월, 그가 벌인 악행의 무게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낮은 형량이었다. 핵심 쟁점인 살인과 유기치사죄는 범행을 증명할 시신의 부재로 인하여 기소조차 하지 못했다. 사망된 것으로 추정되며 사라진 아이들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장씨는 출소 이후 2019년에는 팔순의 나이에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며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그는 경찰과 시민단체, 언론이 결탁하여 자신을 모함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췌장암을 호소하던 모습이 무색하게 장씨는10년 넘게 정정한 모습으로 버젓이 활동했다. 장씨는 올해 2월에 사망했는데, 세상을 떠나기 불과 2주 전까지도 집요하게 피해자들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한편 생존 피해자들은 장씨로부터 구출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후유증에 시달렸다. 피해자 성아씨는 2013년 1월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함께 동고동락하며 고통스러운 세월을 견뎠던 피해자들이 공동으로 상주를 자처하며 마지막으로 성아씨를 전송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뭉클하게 했다.

피해자들에게 진정한 천사는 장씨가 아니라 어려운 시기를 서로 의지하며 함께 보낸 남매들이었다. 이제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았다. 피해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은 남겨진 이들의 몫이다.

'사랑의 집' 사건은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오히려 인권의 사각지대가 만들어지는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세상 어딘가에 또다른 제2, 제3의 사랑의 집이 존재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그 실체는 제대로  파악되지 못 하고 있는 상황이다. 약자에 대한 세상의 편견 속에 제도권 밖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은, 국가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아닐까.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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