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를 키워낸 '마한의 마지막 제국' 완도

완도신문 정지승 2024. 5. 24.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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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신문 정지승]

1800년 전 마한 사람들은 바다를 보며 큰 꿈을 키웠다. 바다는 막힘이 없다. 바다는 마한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통로였다. 그리고 청해진 장보고의 해양세력을 형성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당과의 교역을 통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각국을 아우르는 막강한 힘을, 완도의 바다는 오랫동안 키워내고 있었다. 그 바다 앞에서 완도군은 지금 무엇을 꿈꾸며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4년 전 본보에서는 대대적으로 지역의 마한문화에 관련한 보도를 냈다. 그러나 지역사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역의 언론인을 자처한 이는 본보의 보도내용을 지목하면서 SNS를 통해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지역의 문화를 편파적으로 받아들이는 편협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마한문화권과 탐라문화권 특별법이 제정된 이래 나주시가 중심이 되어 전남 각 시군의 지자체가 마한유적과 관련한 지역 향토사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지난 2020년 5월 20일 국회본회의를 열어 마한문화권을 포함한 6개 고대 역사문화권(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마한, 탐라)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본회의를 통과함에 따라 마한사 재조명을 위한 영산강 고대문화권 복원개발이 탄력을 받아왔었다. 

이 사업은 영산강 유역뿐 아니라 전남의 서부해안권과 남부해안권역까지도 해당됐다. 

법이 발효된 이후 논란거리였던 전북 서부권역까지 마한역사 문화권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학계의 주장에 따라 지난 2021년 12월 31일에는 전북지역과 광주광역시, 충청지역까지 확대되어 국가예산을 확보했고, 유물발굴과 정비사업을 위한 마한의 역사성과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렸다. 그러나 완도군 행정에서만 관심 밖의 일이었다. 

도서지역으로는 신안의 안좌도를 포함해 함평, 고흥 반도, 여수에 이르기까지 마한사 연구와 발굴 조사가 광범위하게 거론됐다. 이에 힘입어 인근의 해남군에서도 마한의 유적발굴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마한의 마지막 제국의 흔적을 뒷받침할 고분군과 도자기 가마터를 대거 발굴함에 따라 학계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상태였다. 아직도 발굴할 유산이 넘쳐난다고 학계는 보고했다. 해남군의 경우 지역 언론이 나서서 마한의 마지막 세력에 관한 내용의 기사를 기획하고 목포대박물관이 함께 지원에 나서고 있다. 행정도 흥에 겨워 TF팀을 구성해 선사유적과 마한사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 완도신문
그런데, 완도군은 여태 선사유적에 관한 연구에는 무방비 상태였다. 마한 유적의 흔적이 없다는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다. 지역 언론이 나서서 강하게 주장을 펼쳤어도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는 꼴이라니. 이에, 전남지역 향토사학자 A씨는 "완도는 권역별로 도출된 선사 유적이 넘쳐나는데도 그동안 이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고, 지난 2005년에야 형식적인 조사만 했을 뿐이라며 지역의 국가유산에 관심도가 타 시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이 아쉽다"고 전했다.
지난 2021년 광주 MBC가 주관한 학술토론회에서 마한유적위원장 임영진(전,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는 "법안이 통과된 계기로 전남지역의 서부해안지대와 남부해안지대 연안과 섬들의 자원조사와 연구가 심도 있게 이뤄져야 한다"고 시청자에게 알리면서 "각 지자체와 주민들의 협력으로 마한사람들이 해양세력을 형성하여 활동했던 대로 그들이 항해한 항로를 따라 전남 서남부권 섬들에 관한 연구의 깊이가 더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완도신문
 
ⓒ 완도신문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한 흔적, 조개껍데기 무더기인 패총이 완도 섬 곳곳에서 발견됐다. 여서도, 평일도, 고금도에 이어 소안면 비자리에서도 그 흔적이 발견됐다. 소안면사무소 옆 소안고등학교 운동장 동쪽에서 발견된 패총과 철기시대 유물인 타날문토기 파편은 마한 사람들이 이곳에 정주했고, 소안군도에도 세력을 형성한 증거로 학계는 보고있다.

선사시대 이래 역사시대 초기까지 섬은 제도권에서 무척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바다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조개류와 물고기, 해초 등 바다생물은 인류의 무궁무진한 식량자원이었다. 바다와 자연이 내어주는 것들은 약탈에 의지하지 않아도 생존 가능한 자급자족의 공간을 형성하게 했다. 

마한 사람들이 활동한 주 무대는 바다였다. 전쟁을 싫어해서 말을 타고 싸움하기보다는 노를 저어 바다를 항해하며 서남해안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했다. 마한의 마지막 제국이 '마한의 남부연맹체로 군림했다'는 언급은 중국 진서에 기록됐다. 이는 마한의 신미 등 여러 나라가 백제를 견제하려고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양직공도의 벽화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완도 지역의 고고학 조사는 섬으로 구성된 지리적 여건상 지난 1960년대 중반 시작했다. 1967년부터 2년 동안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의 남해도서 지역 지표조사가 처음이었다. 이때, 고인돌 군락과 패총 외 선사시대의 토기 등 여러 유물과 유적을 발견했다. 연달아서 학계에서는 완도 지역의 역사유적을 연구했다. 그 결과 소안군도에서 지석묘와 패총 외 유물을 추가로 확인했고, 신지도 고금도 여서도 청산도 완도읍에서 선사유적과 고분 등을 발견했다. 

아쉬운 점은 유적조사만 이루어졌을 뿐 도서지역의 선사유적에 대해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뤄지지 못한 것이다. 선사유적 조사는 계속해서 이뤄졌지만, 기존에 조사한 유적들에 관한 현황 파악과 검토뿐이었다. 그 때문에 유적이 대부분 도굴되거나 도서지역의 개발로 인해 소실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이 상당했다. 

완도는 최초의 인류가 정착하며 살았던 선사시대의 흔적이 매우 빠르고 뚜렷하다. 구석기 시대 유물로는 달도를 비롯해 선사의 유적이 신지 고금에 이르고 청산도는 물론이거니와 최남단 여서도까지 완도 섬 전역에 걸쳐 분포한 것으로 파악된다.  

완도에 부속된 섬 지역의 막강한 해양세력이 분명히 존재했고, 마한 사람들은 육지보다는 바다를 주 무대로 활동 영역을 펼친 것으로 보면 서남해안에 부속된 섬은 모두 마한의 영역이었다. 이런 점으로 미뤄볼 때 영산강 일대와 전남 서남부권역에 형성된 마한의 유적조사와 마한의 마지막 제국의 영역은 완도 섬들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당시의 지역 구분을 참고하면 고고학 연구는 현재의 어느 특정 지역에만 국한된 연구가 이뤄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전남에서는 고대국가 마한을 연구하면서 영산강 일대의 장고무덤의 비밀을 밝히는 연구가 있었고, 그 연구는 여전히 활발하다. 영산강 일대에 형성된 세력과 바다를 무대로 활동한 해양세력을 마한의 영역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이제 학계에서도 이견이 없다. 그동안 많은 유적과 유물이 발굴되면서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에 나오는 내용이 거의 확정적으로 일치했던 것.

우리나라 서남해안 일대가 주 무대였던 마한의 영역이었고,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물류의 거점지대 역할을 다했다.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중요한 해양세력의 거점이었기에 청해진 장보고의 해양세력이 대양을 향해 꿈을 키운 것도 당연한 절차였다. 장보고의 국제적인 활동상으로 중국의 동북공정까지 공격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을 완도군은 갖추고 있음에도 존재하고 있는 문화도 보존할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내 것을 못 지키면 모든 것을 빼앗긴다는 불변의 진리를 완도군정은 애써 외면하고 있는 모양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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