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의 '11번 거부권' 살펴보니…'야당' 아닌 '의회' 견제용

강태화 2024. 5. 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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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1일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정국이 얼어붙었다. 야당은 탄핵 추진 가능성까지 시사한 가운데, 정부와 여당은 삼권분립을 규정한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는 주장으로 맞섰다.

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제2차 경제이슈점검회의를 주재하며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특히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는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도 거부권을 11번 행사했지만, 거부권을 행사했다고 탄핵이 거론되지 않는다”며 거부권 행사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추 원내대표의 말처럼 바이든 대통령은 하원 의석이 공화당 우위로 변한 지난해 1월부터 지금까지 1년 5개월간 총 11번 거부권을 행사했다. 취임 후 2년간 총 10번을 행사한 윤 대통령보다 거부권 행사 빈도가 더 높다고도 볼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등 야당 의원들이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채상병 특검법' 재의요구 규탄 야당·시민사회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다고 미국에선 거부권 행사가 정국이 파국으로 치닫지 않는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한국과 달리 양원제를 채택한 미국에서 법안이 의회의 문턱을 넘으려면 상·하원 모두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지난해 1월 이후 미 하원은 야당인 공화당이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상원은 여당인 민주당 우세다. 바이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은 하원의 공화당 뿐 아니라 상원의 민주당 의원들의 동의를 얻은 법안이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은 ‘야당 견제용’ 또는 ‘여당 방어용’이라기 보다 행정부 수반으로서 상대적으로 급진적 주장을 펼치는 의회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거부권을 행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 바이든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은 경제와 환경 관련이 각각 4건으로 가장 많았고, 노동·복지 2건, 치안 관련이 1건을 차지한다.

차준홍 기자

바이든 대통령은 또 거부권을 행사할 때마다 여야가 합의해 통과시킨 법안이 시행될 경우 행정부의 정책 구현이 어려워진다는 이유 등을 들어 법안을 돌려보냈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미 상·하원은 전기차 충전기 제조에 필요한 자제를 미국산으로 한정한 정부의 결정을 한시적으로 유예하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관련 산업에 대한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의회와 정부의 공동 목표를 지연시키게 된다”고 설명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재임 중 지금까지 11번의 거부권을 행사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할 때마다 거부권 행사의 이유를 직접 밝힌 문서를 첨부해 공개하며 입법부에 양해를 구했다. 미국 상원 홈페이지

반면 윤 대통령이 거부한 10건의 법안은 모두 국회의 과반 의석을 점유한 야당이 여당 동의 없이 단독 처리한 것들이다. 그러다 보니 삼권분립을 위해 헌법이 보장한 입법부에 대한 견제 성격인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는 달리, 한국 대통령의 거부권은 입법부와 행정부 간의 상호 견제보다는 여야 간 정치적 행위의 연장으로 해석될 소지가 크다.

차준홍 기자

한·미 간의 또다른 차이는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 중에는 대통령의 가족 등 주변인을 특정한 특별검사 도입에 반대 사례 4건이 포함된 반면, 바이든 대통령은 거부권을 통해 특검을 거부한 사례가 없다. 국회 표결로 특검 도입을 결정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선 법무부장관이 특검 개시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특검이 의회 표결을 통한 입법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대통령이 의회의 재의를 요구한다는 의미의 거부권 행사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바이든 대통령은 재임 중 ‘기밀문서 유출 의혹’과 관련한 특검 수사를 직접 받았고, 그의 차남 역시 특검 수사의 대상이 됐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차남 헌터 바이든이 지난달 1일 백악관에서 열린 부활절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두 사람은 바이든 대통령 재임 중 특검 수사를 받았다. EPA=연합뉴스

미국 정치 전문가인 스테판 슈미트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 명예교수는 이날 통화에서 “정치적으로 편향된 입법을 견제하기 위해 한·미 모두 거부권을 헌법에 명시하고 재의결 정족수를 3분의 2로 까다롭게 한 것”이라며 “동시에 소모적 논란으로 확대될 수 있는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거부권을 일부 제한하는 등의 제도적 보완을 할 필요는 있다”고 지적했다.

정근영 디자이너

보스턴대 장승모 교수도 “미국은 한국에 비해 조사권 등 광범위한 의회의 권한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대통령의 차남도 특검 수사를 받고 의회 청문회에도 출석했던 것”이라며 “다만 미국의 제도를 참고하기에 앞서 법무장관 등 부처의 독립성과 함께, 여당 역시 독립된 입법부의 주요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고 있는지에 대한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강태화 특파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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