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1100만명이 시청한 한국 대통령의 TV토론

임병도 2024. 5. 23.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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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방일 중 TV출연... "유화한 표정, 강한 의지" 일본인에게 강한 인상

[임병도 기자]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6월 방일후 일본 방송사 TBS의 프로그램에 출연해 질문에 답변하면서 웃고 있다.
ⓒ 참여정부 국정홍보처
 
노무현 대통령 서거 15주기를 맞아 많은 이들이 생전의 그를 떠올립니다. 유튜브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영상 중 하나가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 TV에 출연했던 모습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제일 기억나게 하는 영상으로 꼽힙니다. 

2003년 6월 노무현 대통령은 국빈으로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노 대통령은 일왕을 만나고 일본 국회에서 연설도 했지만, 일본 방송사 TBS가 기획한 '한국 노무현 대통령과의 솔직한 대화'에도 출연했습니다. 

일본인 맞아? 질문하려고 앞다퉈 손든 방청객들 

일본에선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부터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일본 정치 시스템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극적인 역전과 드라마 같은 그의 정치 인생을 일본 언론도 비중 있게 다뤘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북핵 문제로 공포와 불안감에 떨던 시기였기에 더욱 더 한국 대통령의 행보에 주목했습니다. 노 대통령도 일본 방문에서 과거사보단 북핵에 대응하는 한일 양국 문제에 초점을 두기도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출연한 '한국 노무현 대통령과의 솔직한 대화'는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도쿄 스튜디오뿐만 아니라 후쿠오카와 오사카 시민회관 등 3곳에서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계층의 일본인들이 방청객으로 참석했습니다.

당시 영상을 보면 사회자가 질문을 할 사람이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청객들은 앞다퉈 손을 들었습니다. 누가 봐도 사전에 선정된 질문자가 아닌 게 느껴질 정도로 일본인 방청객들은 적극적으로 손을 들었습니다. 공식적인 모임이나 대중들 앞에 잘 나서지 않는 일본 문화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날 일본에서 방영된 '한국 노무현 대통령과의 솔직한 대화'는 일본 국민 1100만 명이 시청했습니다. 공식적인 시청률만 9.2%로 집계됐으니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봐야 합니다. 

"과거사에 대한 제 답변은 가슴에 묻어두겠습니다" 

이날 그 자리에선 스튜디오에 출연한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팩스와 인터넷으로 접수된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그중에는 굉장히 민감한 질문도 있었습니다.

진행을 맡은 여성 아나운서는 "과거사 청산에서 일본은 30%가 해결됐다고 답변했지만, 한국인은 90% 가까이 청산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라면서 "(노 대통령은) 이번 일본 방문에서 과거사 문제를 말하지 않기로 했고, 일본 교과서와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팩스로 질문을 받았다면서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개인적인 생각과 대통령으로서 생각을 들려달라"며 일본을 방문한 한국 대통령이 일본인 방청객 앞에서 말하기 불편한 사안을 직설적으로 물어봤습니다. 

노 대통령은 "제가 취임식을 앞두고 고이즈미 총리를 초청하려고 했는데 그때 고이즈미 총리가 신사 참배를 했다. 그래서 이 초청을 취소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의 문제를 놓고 고심했다"라며 "그때 초청을 취소해 버리면 한일 관계는 다시 얼어붙어 버린다. 그 당시 우리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손발을 맞추어 나가야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가로놓여 있는데, 그 문제로 초청을 취소해 버리고 해서 양국 간 지도자 사이에 감정이 생겼을 때 이후의 중요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이냐. 이런 것이 현실적인 문제였다"라며 실제 야스쿠니 신사참배로 인한 한일 간의 갈등 사례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제가 와서 북핵 문제에 관해서 긴밀히 협의해야 하고 거기에 서로 의기투합해야 하고, 신뢰해야 하는데 과거 얘기를 자꾸 들먹거리면 그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라면서 "모든 것을 저는 다 묻어두자는 뜻은 아니지만, 모든 문제를 다 후벼 파서 감정적 대립 관계로 끌고 가는 것이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명한 방법으로 풀어가자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과거사에 대한 질문을 하셨습니다만, 답변은 제 가슴속에 묻어두겠습니다"라고 마무리했고, 방청객들은 박수를 쳤습니다. 

노무현 "일본은 사과만 말고 행동으로 보여라"

한국의 보수 우익에선 노 대통령의 답변을 놓고 "일본에 아무 말도 못 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보여준 노 대통령의 단호한 태도와 발언을 보면 못 한 게 아니라 안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05년 부산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당시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과거 전쟁에 대해서 반성을 하면서 두 번 다시 이런 전쟁을 하면 안 된다는 취지"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일본 국민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본질적 문제이고, 아무리 고이즈미 총리의 생각을 선의로 해석하려고 해도 우리 국민들은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역사교육 문제, 독도 문제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고이즈미 총리에게 "일본은 사과만 말고 행동으로 보여라"면서 "세 가지 (야스쿠니 신사참배, 역사교육, 독도 문제) 요구는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2006년에는 한일 관계에 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면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식민지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이라며 주권 수호 차원에서 정면 대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노 대통령은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에 부합되는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라며 "한국의 주권과 국민적 자존심을 모욕하는 행위를 중지하라"고 엄중 경고했습니다. 

사회자의 평가 "노 대통령은 사고의 일관성과 철저한 평화주의자" 
 
 '한국 대통령과의 솔직한 대화' 프로그램이 끝난 후 사회자가 평가한 노무현 대통령
ⓒ 유튜브 갈무리
 
'한국 노무현 대통령과의 솔직한 대화' 방송이 끝난 후 진행자였던 고 치쿠시 데쓰야씨는 노 대통령을 가리켜 "말은 부드럽지만 생각이 매우 일관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원칙을 중요시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북한에 대해서는 철저한 평화주의자"라고 평했습니다.

<아사히 신문>은 사설에서 "유화한 표정, 강한 의지, 한국의 전후 세대 첫 대통령으로서 방일한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 국민들에게 남긴 인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항상 국민과 소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기자회견뿐만 아니라 인터넷과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국민과 만났고, 그때마다 자신의 생각과 국정 철학을 전달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일부 언론에서는 그의 말을 가리켜 막말이라고 했지만, 그의 말은 한국은 물론 일본인들도 공감할 정도로 쉽고 간결했습니다. 

"국가 지도자의 말은 말재주 수준이 아니고 사상의 표현이고 철학의 표현"이라는 그의 말이 떠오르는 5월 23일입니다. 

덧붙이는 글 | 독립언론 '아이엠피터뉴스'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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