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중앙] 긴급 인터뷰 | “천막당사 정신 사라져… 수도권 30대가 전면에 나서야”

2024. 5. 2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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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재건의 길, ‘원조 소장파’ 정태근 전 의원에게 묻다

“국민의힘 참패는 예정된 결과, 차떼기 오명 때보다 더 위기”
“뜻 맞는 정치인들과 자주 모여라” 30대 김재섭(국민의힘 서울 도봉갑) 당선인에 조언

정태근 전 한나라당 의원은 5월 2일 서울 마포구 중앙일보빌딩에서 “사안의 엄중함으로는 한나라당 때가 훨씬 위기였지만, 당내 상황까지 종합하면 지금 국민의힘이 더욱 심각해 보인다”고 말했다.

"천막당사를 거치며 재창당 수준의 혁신을 감내하고,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다시 국민 신뢰와 지지를 회복했었다.”(배준영 국민의힘 원내수석부대표)

“천막당사에서 비장한 각오로 끊임없이 혁신했기에 두 차례 대선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다.”(서병수 국민의힘 의원)

제22대 총선 이후 보수 진영에서는 ‘천막당사’가 자주 언급된다. 2000년대 초반 차떼기 사건,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코너에 몰린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을 구한 천막당사 정신이 지금 국민의힘에 필요하다는 목소리다. 하지만 이러한 자성의 목소리가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6월 말로 예정된 전당대회를 앞두고 친윤-비윤 주도권 싸움이 다시금 불붙는 모양새다. 과연 폐허가 된 보수는 재건될 수 있을까? 5월 2일 서울 마포구 중앙일보빌딩에서 천막당사 주역(主役) 중 한 명인 정태근 전 한나라당 의원을 만났다.


보수 소장파 모임, 20대 국회부터 명맥 끊겨


2004년 3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침몰 직전이던 한나라당의 새로운 대표로 선출된 박근혜 의원이 첫 출근날 당사 현판을 들고 천막당사로 향하고 있다.

Q : 국민의힘이 22대 총선에서 참패했다.

“나는 예정된 결과였다고 본다. 본질적으로는 윤석열 대통령의 책임이 커 보이지만, 국민의힘 역시 강성 지지층을 통해서만 사회를 바라보느라 국민께 보수가 가야 할 길을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Q : 국민의힘과 2000년대 초 한나라당 중 어느 쪽이 더욱 위기인가?

“사안의 엄중함으로는 한나라당 때가 훨씬 위기였지만, 당내 상황까지 종합하면 지금 국민의힘이 더욱 심각해 보인다.”

2003~2004년 한나라당은 창당 이래 최대 위기에 처했다. 수백억원의 기업 비자금을 대선 자금으로 수수한 이른바 ‘차떼기 사건’으로 당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됐으며,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을 소추했다가 실패해 역풍을 맞았다. 원투펀치에 그로기 상태가 된 한나라당은 2004년 4월 제17대 총선에서 50석도 못 건질 것이라는 진단을 받기도 했다.

Q : 당시 한나라당 상황은 어느 정도로 심각했나?

“불법 대선자금 전달사건, 소위 ‘차떼기 사건’으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핵심 측근들이 구속되기 시작했고, 언론에서는 ‘무슨 차에서 얼마가 나왔다’라는 식의 헤드라인이 쏟아졌다. 여기에 더해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나섰다가 역풍을 맞았다. ‘차떼기라는 큰 잘못을 한 정당이 탄핵을 도구로 무리하게 상황을 역전시키려고 한다’며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상황이었다.”

Q : 당내에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나?

“개혁적 소장파(少壯派)들은 ‘탄핵은 안 된다’라고 주장했었다.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 회부된 날 나와 남경필·원희룡·전재희 의원 등 미래연대 소속 소장파들이 나서서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우리는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뒤편 둔치에 천막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 한나라당이 당사를 포함해서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미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보수 정당 소장파 모임의 계보는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을 시작으로 미래연대(16대), 수요모임(17대), 민본21(18대), 경제민주화실천모임(19대) 등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보수 정당 소장파 모임은 20대 국회부터 명맥이 끊긴 상태다.

Q : 개혁의 상징인 ‘천막당사 정신’은 왜 사라지게 된 걸까?

“몇몇 정치 신인을 제외하고는 정치인으로서의 소명의식이 부족해 보인다. 공천에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정치하는 목적, 지향하는 노선을 기준으로 행동해야 되는데,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소명의식이 없는 정치인에게는 국민보다 공천을 주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 그러니 당내 비판의 목소리가 점차 실종됐다. 용산 대통령실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져도 침묵한다. 시기를 특정하기는 힘들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 정치가 그렇게 돼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천막당사는 정태근 당시 원외위원장, 고(故) 정두언 의원 등이 주도하고 남경필·권영세·정병국 의원이 도왔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2004년 3월 전당대회에서 새로운 대표로 선출된 박근혜 의원이 중앙당사 현판을 떼어내고 천막에 가세하면서 완성됐다. 쇄신 노력이 통했던 걸까. 한나라당은 50석도 못 건질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을 깨고 그해 4월 열린 17대 총선에서 원내 121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 보수당,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했기에 살아남아


민본21이 2009년 4월 김형오 국회의장을 초청해서 조찬 간담회를 가졌다. 민본21은 한나라당 내 ‘개혁적 초선의원 모임’으로 2008년 9월 권영진, 권택기, 김선동, 김성식, 김성태, 김영우, 신성범, 윤석용, 정태근, 주광덕, 현기환, 황영철 등 한나라당 초선의원 12명이 발족했다. / 사진:국회 홈페이지 캡처

Q : 이견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합의점을 찾았나?

“당에 큰일이 있으면 초선 의원이 선배들을 찾아가 논의했고, 그래도 결론이 나지 않으면 저녁에 함께 소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정치는 함께 방안을 찾고 합의해서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은 언제든 토론에 임할 수 있도록 평소에 공부가 돼 있어야 한다. 실제 17~18대 국회 때는 여러 정치인이 언론사 논설위원, 학계 전문가 등을 찾아다녔다.”

Q : 앞서 “당내 상황까지 종합하면 지금 국민의힘이 더욱 심각해 보인다”고 했다.

“한나라당 시절에는 주류 세력과 소장파가 위기의식을 공유했다. 지금 국민의힘에서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나? ‘친윤’ 중에 성찰적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던가? 몇몇 개별 의원이 위기의식을 갖고는 있지만, 함께 모여서 논의하고 행동하려는 시도는 대단히 미미해 보인다. 그래서 한나라당 때보다 훨씬 더 큰 위기라고 한 거다.”

1964년 서울 출생인 정 전 의원은 홍익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이후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0년대에 연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운동권 출신으로 제18대 총선(2008년)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 성북갑에 출마해 당선됐다. 고 정두언 전 의원, 남경필 전 경기지사 등 개혁 성향 인사들과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Q : 당시 소장파 의원들이 롤모델로 삼는 것이 있었는가?

“영국의 보수당이다. 영국에서 보수당이 오랜 기간 집권할 수 있었던 건 사회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했기 때문이다. 진보 세력이 사회 변화를 선도한다면, 보수 세력은 변화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2차대전 후 보수당은 노동당 정권의 NHS(국민건강서비스)와 같은 핵심적인 보건 복지 정책들의 기조를 이어나가며 큰 호응을 얻었다. 국민이 보수당의 안정성에 행복감을 느끼면 보수를 지지하는 거다. 반대로 변화를 안정적으로 관리하지 못하면 저항에 부닥친다.”

Q : 그 기준으로 현재 국민의힘의 문제를 진단한다면?

“한국 사회는 양극화·저성장·수축사회에 직면해 있지만, 국민의힘은 집권당임에도 이러한 변화에 둔감하게 움직이고 있다. 나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25만원 민생지원금에 동의하지 않지만, 민생문제에 적극적으로 반응한다는 측면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소장파가 갖춰야 할 소양? 소명의식과 자존심


정태근 전 한나라당 의원은 5월 2일 서울 마포구 중앙일보 빌딩에서 “진보 세력이 사회 변화를 선도한다면, 보수 세력은 변화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했다.

Q : 국민의힘은 대통령실과 수직적인 관계로 비판받고 있다.

“국민께서 윤석열 정권에 가장 실망하는 부분 중의 하나가 인사 문제다. 물론 과거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강부자’(강남 땅부자) 등 인사 논란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한나라당 내부에서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분명히 존재했다. 예를 들면 고 정두언 의원과 내가 이상득 부의장을 찾아가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또 민정수석을 지냈던 분을 감사원장에 기용하려고 했을 때 소장파들이 들고일어난 적도 있다. 이런 모습이 현재 국민의힘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2대 총선 당선인들의 평균연령은 56.3세, 이 중 30대 정치인 비율은 4.7%로 당선인 300명 중 14명이다. 이들 중 보수 정당 당선인은 국민의힘 김용태(경기 포천·가평, 33세)·김재섭(서울 도봉갑, 36세)·우재준(대구 북갑, 35세)·조지연(경북 경산, 37세)과 개혁신당 이준석(경기 화성을, 39세) 당선인 등 5명에 불과하다.

Q : 소장파에게 필요한 소양은 무엇일까?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는 앞서 얘기한 소명의식, 둘째는 자존심이다. 자존심이 있어야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자신의 길을 잃지 않게 된다.”

Q : 이번 총선에서 당선된 30대 중에 눈여겨본 정치인이 있나?

“선거운동 기간에 김재섭 당선자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김 당선자에게 ‘혼자 할 생각하지 말고 뜻이 같은 사람들과 모여서 대화해야 한다’고 덕담을 건넸다. 나와 정두언 전 의원이 속했던 ‘민본21’은 매주 모였고, 현안이 생길 때마다 만나 논의했다.”

Q : 모이기만 해서는 사안을 해결할 수 없다. 행동에 나서야 할 때도 있을 텐데…

“당시 우리는 모임에서 논의된 내용을 문서화해서 매달 청와대에 보냈다. 청와대에서 참조하든, 그러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계속 보냈다. 그런데도 변화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위험을 각오하고 들고 일어났다. 지금 국민의힘 내 상황을 보면 초선 의원들이 예전 우리처럼 행동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김재섭 당선자든, 김용태 당선자든 젊은 정치인들이 중심이 돼 당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국민의힘에는 희망이 없어 보인다.”

- 글 최현목 월간중앙 기자 choi.hyunmok@joongang.co.kr / 사진 최영재 기자 choi.yeongj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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