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쓸 일 많은 5월, 여기 가서 적게 쓰고 힐링했어요

윤용정 2024. 5. 23.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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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편안하게 함께 하는 부모가 좋은 부모라는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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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정 기자]

5월은 가정의 달, 아니 내게는 가혹한 달이다. 어린이날에 고등학생인 두 아이에게 특별 용돈을 주고, 초등학교 4학년 막내딸한테 게임팩을 선물했다. 어버이날에 양가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평소에 가기 힘든 비싼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월급은 안 올랐지만 물가가 올랐으니 용돈과 선물의 규모도 커지고 식대도 비싸졌다. 

다음 달 카드값을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당분간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지만, 막내딸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고등학생인 두 아이가 막내딸 나이 때는 어린이날이면 소규모 놀이동산에라도 놀러 나갔었는데, 늦둥이 막내를 키우면서는 5인 가족이 나가서 돈 쓰는 게 무서워 선물만으로 때우곤 했다. 

돈 적게 쓰고도 하루 종일 놀 수 있는 곳 없을까.

요 며칠 날씨가 정말 화창하고 좋았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돈 걱정하면서 한숨만 쉬기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돈 안 쓰고 아이와 놀러 갈 만한 곳이 없을까? 아이와 갈 만한 놀이동산, 극장, 실내 놀이터, 아쿠아리움을 떠올리며 계산기를 두들겨 봤다. 아이와 나 둘만 가도 입장료, 음식 및 간식 등 10만 원은 우습다. 어디든 놀러 나가보면 다리가 아파 잠깐 앉아 쉬고 싶어도 돈을 내고 뭐라도 사 먹어야 한다. 

여기저기 떠올려 보다가 돈을 별로 쓰지 않고 하루 종일 놀 수 있는 곳, 서울동물원이 생각났다. 서울동물원은 집에서 많이 멀지도 않고, 도시락을 싸가서 먹을 수도 있으며, 다둥이 카드가 있으면 입장료도 무료다.

작년 가을에 아이와 함께 창경궁 역사 해설을 들으러 간 적이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이 우리 역사를 훼손하기 위해 창경궁을 창경원이라는 동물원으로 만들었다. 창경원을 다시 창경궁으로 복원하면서 서울시에서 과천에 땅을 매입해 동물들을 옮겼고, 관리도 서울시에서 한다. 그래서 동물원 위치가 과천인데도 서울대공원이라 이름 붙여졌고, 2009년에 서울동물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월요일에 회사에 연차 신청을 하고, 딸아이의 학교에는 현장체험학습 신청을 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김밥과 소시지, 과일을 넣은 도시락을 쌌다. 물은 무거우니 사 먹기로 하고, 캔음료 두 개와 과자 몇 봉지를 챙겼다. 

서울 은평구 우리 집에서 3호선 지하철을 탔다. 중간에 한 번 갈아타고 4호선 대공원역에 내렸다. 대공원역에서 코끼리열차나 리프트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걷기에도 멀지 않아 주변 화단과 호수를 구경하며 딸의 손을 잡고 동물원 입구까지 걸었다. 전날까지 낮에는 햇볕이 뜨거웠는데, 그날은 하늘이 흐려서 걷기 좋았다.

동물원 입구에서 다둥이 카드를 보여주고 티켓을 받았다. 원래 입장료는 성인 5000원, 어린이 2000원인데, 다둥이카드를 가지고 가면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서울 동물원은 산기슭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약간의 오르막길이다. 우리는 리프트를 타고 정상까지 올라간 뒤, 걸어 내려오면서 동물들을 보기로 했다. 리프트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 꼭대기에서 내렸다. 
 
 서울동물원 내 리프트. 대공원역 근처에서 입구까지 가는 1호선과 입구에서 정상까지 가는 2호선이 있는데, 우리는 2호선을 탔다.
ⓒ 윤용정
 
리프트에서 내린 시간은 11시 30분경, 딸이 배가 고프다고 했다. 서울동물원 안에는 피크닉 테이블이 곳곳에 많기 때문에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장소에 앉아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우리는 호랑이, 곰 등 맹수가 사는 곳 근처에 앉아, 곰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도시락을 먹었다.
 
 집에서 싸간 도시락
ⓒ 윤용정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고,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쉴 수 있는 벤치가 많아서 좋았다. 우리는 동물을 보는 시간만큼 앉아서 쉬는 시간도 길게 가졌다. 욕심내서 모든 동물들을 다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날 보고 싶은 동물만 찾아보고, 나머지는 다음에 다시 와서 보기로 했다. 

공작마을을 구경하고 나와서 쉬고, 악어를 보고 나와서 쉬고, 독수리와 수리부엉이가 있는 맹금사를 보고 나와서 또 쉬고, 낙타와 하이에나, 원숭이를 보고 나서도 쉬었다. 쉬면서 우리가 보고 온 동물에 관한 이야기, 더 보고 싶은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씩 하는 것 외에 우리는 별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 가끔씩 우리는 대화를 주고 받았다. 

"엄마, 나 오늘 기분이 너무 좋아."
"엄마도 너무너무 좋다."
 
 서울동물원에 사는 홍학, 악어, 기린, 원숭이, 호랑이
ⓒ 윤용정
 
동물원 출구 쪽으로 내려와 기린과 홍학을 보고 나서 맞은편을 보니, 서울에서 일부러 찾아가는 숲 속 카페 같은 곳이 보였다. 아무나 앉아도 되는 테이블이었다.
잎이 푸르른 나무들과 그 사이로 비치는 햇살, 계곡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몇십 분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서울동물원 곳곳에는 이렇게 돈 안쓰고도 앉아 쉴 수 있는 편안한 자리가 많았다
ⓒ 윤용정
 
보통 어디든 놀러 가면 바삐 움직이느라 피곤했는데, 그날은 정말 쉬러 나온 것처럼 편안했다. 예전에 비싼 돈 내고 들어가는 체험장이나 놀이동산에서는 본전 생각이 나서 하나라도 더 경험하고 가려고 애쓰다 보니, 오히려 힘이 들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 

이날 내가 쓴 돈은 지하철 교통비와 동물원 안에서 탄 리프트 값 14000원, 자판기에서 뽑아 먹은 생수와 음료값 4000원이 전부였다. 아이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데 꼭 큰돈이 드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비싼 데 데려가서 짜증 냈던 그 어떤 날의 나보다, 돈 없이도 여유로운 모습으로 아이와 함께 한 내가 더 좋은 부모였다고 느낀 하루였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발행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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