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무' '가난한 사랑노래' 쓴 문단 거목 신경림 시인 별세

홍지유 2024. 5. 22.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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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가져 서러운 이들의 한과 신명을 정감 있게 그려 사랑받은 『농무(農舞)』의 시인 신경림씨가 22일 오전 8시 경기도 고양시 국립암센터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의대 재학 시절부터 고인과 인연을 맺어 온 센터장 서홍관 시인 등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고 한다. 88세.

시집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 등을 쓴 문단의 원로 신경림 시인이 22일 별세했다. 연합뉴스


1936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중학생 때 한국전쟁을 겪었다. 충주고를 거쳐 동국대 영문과에 진학, 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이 추천돼 등단했지만 시 쓰는 일에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생생한 마당에 시작(詩作)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다.
65년 "네가 시를 쓰지 않으면 나도 쓰지 않겠다"며 붙드는 김관식 시인의 손에 이끌려 다시 서울에 올라오기까지 10년 간의 공백이 그의 시인 이력 한 가운데 가로 놓여져 있다.
평창·영월·문경·춘천 등을 떠돌며 광부·장사꾼·잡부·영어학원 강사 등을 전전한다. 대학 시절 독서회에 가담해 '공산당 선언'을 탐독하기도 한 고인은,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던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59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자 특히 분노했다고 한다. 세상에 대한 복수심과 체념으로 해체돼가는 농촌현실을 기록한 시편들이 75년 창비시선 1호로 출간된 『농무』의 뼈대를 이룬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파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농무')

절창이라 할 이런 시편이 수록된 『농무』는 원래 자비 출판 시집이었다. 초판 300부가 시중에 깔리기 무섭게 팔려 나가자, 새로운 문학 이념에 맞는 작품에 목말라 하던 출판사 창비가 74년 제정한 1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한 데 이어 이듬해 창비시선으로 증보 출간했다.
창비의 좌장 백낙청씨가 "민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받아 마땅한 문학", 평론가 유종호씨가 "이전의 시집들을 추문으로 만들어 버리는 시집"이라고 극찬한 가운데, 주변부 삶으로 밀려난 농촌 현실을 그린 대표적인 민족 시집으로 평가받는다.
민중의 삶과 동떨어진 현학적인 작품을 경계했던 고인은 만해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혼자만이 아는 관념의 유희와 말장난으로 이루어진 시에 대한 반발"로서 글을 쓴다고 밝혔다. 이후 『농무』는 10만 부 이상 팔려나갔다.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된, 한국 문단 일대의 사건이었다.

『농무』는 문학상 수상 이후 1974년 창비에서 재출간됐다. 최근 500호를 찍은 ‘창비 시선’ 1호의 출발이었다. 사진 창비


이후 시인은 반세기 넘는 시간 동안 『새재』(1979), 『달 넘세』(1985), 『민요기행 1』(1985), 『남한강』(1987), 『가난한 사랑노래』(1988), 『민요기행 2』(1989), 『길』(1990), 『갈대』(1996),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9), 『낙타』(2008), 『사진관집 이층』(2014) 등의 시집을 써냈다. 『한국 현대시의 이해』(1981),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1983), 『우리 시의 이해』(1986) 등의 평론집도 펴냈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가난한 사랑노래'는 산업화 시기 도시 노동자 청년의 고달픈 삶을 노래한 시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가난한 사랑노래' 중)

시인 신경림은 1970~1980년대 한국시를 대표하는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 등을 남겼다. 중앙포토


'갈대'에는 삶에 대한 성숙하고 관조적인 태도가 드러나 민중시와는 또 다른 울림을 준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조용히 울고 있었다/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갈대')

시인은 생전에 낸 마지막 시집 『사진관집 이층』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정리했다.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중)

『사진관집 이층』(2014)은 신경림 시인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낸 시집이다. 사진 창비


같은 시집에 수록된 '별'은 노년의 삶을 관조하는 소박한 시다.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하늘에 별이 보이니/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별')

고인은 현실 참여에도 적극적이었다.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를 규탄하는 사회 원로 지지 선언에 동참했고, 2015년 세월호 1주기에 추도 시 '언제까지고 우리는 너희를 멀리 보낼 수가 없다'를 발표해 다른 시인들의 추모시를 함께 엮은 동명의 시집으로 출간했다. 제주 4·3의 아픔을 담은 시집 『검은 돌 숨비소리』도 펴냈다.

생전에 만해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시카다상, 만해대상, 호암상 등을 수상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동국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문인장으로 치러진다. 한국시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한국평론가협회 등 문인 단체들이 뜻을 모았다. 유족으로는 아들 병진·병규씨와 딸 옥진씨 등이 있다. 장례는 4일장으로 진행되며 발인은 25일 오전, 장지는 충주시 노은면의 선영이다.

신준봉∙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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