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시원한 국수처럼 술술 읽히는 산문이라니

홍성식 2024. 5. 22.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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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그저 예뻐서 마음에 품는 단어> 출간한 시인 이소연

[홍성식 기자]

 최근 산문집 <그저 예뻐서 마음에 품는 단어>를 출간한 이소연 시인.
ⓒ 이소연 제공
 
푸른 바다가 지척에서 일렁이는 경상북도 포항에서 유년과 소녀시절을 보낸 시인 이소연이 깔끔하게 단장된 매혹적인 산문집을 출간했다. 이름하여 <그저 예뻐서 마음에 품는 단어>.

10년 전 시인으로 등단한 이소연은 그간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거의 모든 기쁨>이란 제목을 단 시집을 펴내며 서서히 그러나, 성실하게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젊은 작가이다.

운문으로 구축된 시와는 달리 에세이 혹은, 수필은 산문을 사용해 만들어진다.

한국 문단을 떠도는 흥미로운 풍문 가운데 하나가 "산문을 주로 써온 작가는 운문을 잘 쓰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운문을 쓰는 시인들은 산문을 못 쓰는 경우가 드물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대부분의 시인은 수필도 잘 쓴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이소연의 산문집을 펼쳐들었다. 기자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조그맣고 세련된 판형의 산문집(수필집) <그저 예뻐서 마음에 품는 단어>는 여름날 먹는 시원한 국수처럼 술술 넘어가듯 읽혔다. 뿐 아니다. 행간에 담긴 의미와 메시지의 무게도 만만찮았다. 기대 이상의 즐거운 독서였다.

이소연의 산문집에선 세계와 인간의 내밀한 본질을 시인의 예민한 촉수로 더듬어낸 눈 밝은 문장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해낼 수 있다. 이는 쉽게 이루지 못할 인정할만한 작가적 성취다. 예컨대 아래와 같은 것들.

<그저 예뻐서 마음에 품는 단어> 중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방법'이란 소제목을 단 글의 몇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다.

"(전략)…중국 북송 황제 휘종이 궁중의 화가들에게 '말발굽에 묻은 꽃향기'를 그리라고 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꽃향기를 어찌 그리란 말인가. 화원 하나가 말발굽을 쫓아가는 나비 떼를 그린 그림이 휘종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고 한다.

누군가 내게 참새 지저귀는 소리를 그리라고 하면 인동덩굴을 가득 그려 놓으면 될까? 휘종이 깊은 산속에 감춰져 보이지 않는 절을 그리라고 하는데도 많은 화가가 눈에 보이는 절을 그리는 데 집착했다고 한다. 그 마음도 이해가 간다.

내가 말하지 않아서 알아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럴 땐 결심이나 용기가 필요하다. 누군가는 내 의도를 정확히 읽어 내리라는 기대 속에서 과감히 생략하는 용기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는 상태로 둘 수 있는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것이 있다.…(후략)"

책 읽기를 끝내니, 산문집 <그저 예뻐서 마음에 품는 단어>가 어떤 경로를 통해 탄생한 것이고, '이소연은 이걸 무슨 마음으로 썼을까'라는 게 궁금해졌다.

그래서다. 이소연에게 질문지를 보냈다. 다음은 그 물음을 접하고 보내온 이소연의 답변을 요약한 것이다.

시는 과거를 현재로 살아가게 하는 일
 
 이소연 신작 산문집 <그저 예뻐서 마음에 품는 단어>.
ⓒ 앤드
 
- 바닷가 포항에서 유년을 보낸 것으로 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인상적인 풍경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머물렀다. 부모님은 아직 포항에 있다. 산문집 곳곳에 포항에 대한 기억이 담겨 있다. 아홉 살 때까지 살았던 동네 풍경이 생생히 떠오른다. 산 밑에 자리한 집까지는 버스가 다니지 않아 연일사거리에서 한참 걸어 들어가야 했다. 그 하염없이 이어지던 길이, 양쪽으론 논밭뿐인 그 후끈후끈한 여름길이 자꾸 떠오른다. 어머니가 아픈 날 데리고 그 길을 걸어 나오는 동안 병이 낫곤 했다. 이상했다. 보건소 문이 닫혀 진료를 받지 못했는데도 보건소 옆 슈퍼에서 사이다 한 병 마시면 병이 낫곤 했으니까."

- 시집을 2권 낸 시인이다. 시와 산문을 쓸 때는 마음가짐이 다를 듯하다.

"시를 쓸 땐 본업의 마음이 있다. 더 고심하고 애쓰는 시간이 힘들면서도 힘들지가 않다. 노력이 허투루 돌아가도 아깝지가 않다. 시를 쓰고 나면 기분이 좋다. 할 일을 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반면 산문을 쓸 때는 고심하고 애쓰는 시간보다 솔직하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리는 것 같다. 시에서도 솔직하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솔직함이 산문에는 있다. 말 안 해도 아는 것과 말을 해야 아는 것의 차이인가 싶기도 하다. 시는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건너뛰어도 사유를 만들어 놓고 산문은 쓰는 과정을 통해서, 뭔가에 대해서 알아가는 느낌 속에 사유가 있었다."

- 2014년 등단했으니, 10년차 시인이다. 시는 무엇이고, 시인은 어떤 존재인가.

"시는 과거를 현재로 살아가게 하는 일이고 나와 나를 대면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봄이라 포항 곳곳에 아카시아 꽃이 만발했는데, 꽃을 보니 백일장 나가던 때가 떠올랐다. 백일장 장소가 포항 수도산이었던 것 같다. 마치 이미지가 과거와 현재를 이어 놓는 사다리 같다. 10년차 시인이 되어서 작은 변화라면 이제는 시를 쓰는 일이 두렵지 않다. 물론 예전에도 두렵지 않았다. 그때는 몰라서 두려운지 몰랐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지금도 역시 시를 모르지만 실패가 단순히 실패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에게 시는 그저 쓰는 과정일 뿐이다."

- 산문집 출간의 계기가 있었는지.

"'한국경제신문'에 2022년 4월부터 칼럼을 연재했다. 오피니언을 눈여겨 본 편집자가 있어 제안 받았다. 새롭게 원고를 집필하라고 했으면 산문집 출간이 어려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연재 마감 덕분에 매달 원고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고, 그간 발표한 산문들도 결이 비슷해 함께 모았더니 한 권의 산문이 됐다."

- 산문집 제목이 좋은데 직접 지은 것인지.

"세상 여기저기에 놓인 글감들은 그저 예쁜 것 같다. 그것에게 다가갈 수 있는 힘을 준다. 글을 쓰려면 먼저 다가가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은가. 요즘 속이 안 좋아 한약을 먹고 있다. 그 탓에 밀가루 음식을 피하는 중이다. 밀가루 아닌 것들과 친해져야 하는데 그것을 찾는 일이 시를 찾는 일과 비슷한 것 같다. 자꾸 먹을 수 없는 것에 가 닿게 한다. '그저 예뻐서 마음에 품는 단어'라는 제목은 '포란의 계절' 산문의 첫 문장에서 따온 것이다. 그저 예뻐서 마음에 품는 단어는 '포란(抱卵)'이다. 동물이 알을 품는 행위를 뜻하는 말이지만, 나는 이 말을 봄과 나란히 두며, 많은 걸 품었다. 글이라는 건 말을 말로서 지나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품게 해서 좋다."

- 시와 산문, 통칭해 문학은 인간에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직도 문학은 읽고 싶은 이들에게, 사유하고자하는 이들에게 파동을 일으킨다. 문학에 관심 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렇지 않다. 많은 이들이 아직 시를 좋아하고 문학에 관심을 가진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블로그 등의 SNS채널마다 공유하는 문학들이 있고 난 그것들에 영향을 받는다. 적어도 문학은 나에게 힘을 발휘하고 있고, 내가 아는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힘을 발휘하고 있다."

- 주목하는 동년배 작가는 누구이고, 주목의 이유는.

"김은지 시인이 생각난다. 이제 거의 버릇처럼 튀어나오는 이름이다. 같이 활동을 많이 한다. 김현 시인, 유현아 시인도 있다. '해변'이라는 공간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주목하는 이유는 함께하기 때문이다. 함께하는 이들의 작품을 주목하지 않고 나를 가꿔 나갈 수는 없다. 그밖에 철공소에서 일하는 사람, 소금가마니를 지고 히말라야를 오르는 사람, 절벽을 타고 올라 꿀을 따는 사람들이 내가 주목하는 미래의 작가다. 이런 분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다. 거기에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 문인으로서의 단기 계획과 중장기 계획은.

"5월 마지막 날 출판사 창비에서 세 번째 시집 <콜리플라워>가 출간될 예정이다. 그리고 청소년 시집 출간과 신문 오피니언 연재도 이어나가야 한다. 앞으로 다음 시집은 10년 동안 퇴고하겠다. 물론 그 안에 낼 수도 있다.(웃음)"
 
 독자들과 함께 북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는 이소연 시인.
ⓒ 이소연 제공
 
- 이번 책 출간 뒤 독자들이 보내준 가장 인상적인 의견은.

"셋째 이모가 전해준 얘기다. 병원에 입원한 이모부에게 심심할 때 읽어보라고 내 책을 선물했는데, 평소 책도 잘 안 읽고 대화도 거의 없는 사람이 '정말 재미있게 소설을 읽었다'며 책 내용을 상세하게 이야기 해주더라는 얘기였다. 에세이를 썼는데 소설로 이야기한 게 너무 재밌어 기억에 남는다. 문학과는 거리가 먼 분이라 장르도 잘 모르시는 분도 재미있게 읽었다는 점이 좋았다. 나의 문학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쉽게 다가갈 수 있다면 좋겠다."

- 덧붙일 말이 있다면.

"나를 낳아주고 품어준 아빠 엄마의 바다, 포항 바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에 게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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