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는 대화이면서 대결... 연주자끼리는 승부 결과 알아요"

신승민 2024. 5. 2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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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드러머 박태헌

[신승민 기자]

합정역 근처 건물 지하에 있는 한 재즈 클럽. 거리에 사람이 붐비는 평일 저녁인데도 이곳을 찾은 관객은 단 한 명뿐이다. 뭐하는 곳인지 궁금해서 들어온 손님들도 썰렁한 관객석을 보고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발을 돌린다. '재즈는 외로운 장르'라고 말하는 드러머 박태헌에게는 익숙한 풍경이다. 그는 오늘도 변함없이 드럼 앞에 앉아 스틱을 쥐고 손을 푼다.
 
 드러머 박태헌이 드럼을 연주하고 있다
ⓒ 신승민
 
재즈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 오늘 이 근처엔 왜 오신 거죠?
"공연하러 왔어요. 합정동에 있는 '재즈다'라는 클럽에서 매주 목요일에 열리는 잼 데이(Jam Day)의 호스트를 맡고 있습니다."

- 잼 데이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재즈에만 있는 독특한 형태의 공연이죠. 재즈의 언어를 잘 알고 있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즉흥으로 재즈 스탠다드를 연주해요. 오늘 내가 누구를 만날지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죠. 재즈의 본질을 가장 제대로 즐길 수 있는 형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재즈가 뭐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밈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어요. 재즈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보통 재즈의 가장 특징적인 속성으로 즉흥성을 떠올리죠. 그렇다고 '재즈는 자유로운 음악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해라고 생각해요. 무대 위에서 연주자들이 주고받는 즉흥 연주에 아무 맥락이 없는 것은 아니거든요. 자유로워 보이는 연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 촘촘한 룰이 있어요. 몇 마디씩 솔로를 하고 다시 주제로 돌아올지도 약속이 되어 있고, 각자의 솔로 연주에도 맥락이 존재해요. 다른 악기가 어떤 아이디어로 연주를 하면 그에 상응하거나 더 발전시킨 연주로 답해야 하죠. A로 물으면 A나 A'로 답을 해야지, 여기에 B로 답하면 각자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집단적 독백이 되어버려요."

- 이전에 '재즈는 지하 격투장에서 벌어지는 무림 고수들의 대련'이라고 표현하신 게 인상 깊었어요.
"일정 부분은 아직도 동의해요. 재즈는 대결의 속성도 가지고 있어요. 저쪽에서 나를 헷갈리게 할 의도로 도전적인 질문을 해오면 전의가 불타올라요. 그럴 때면 '나는 절대 헷갈리지 않아. 그리고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지'라고 확실하게 보여주죠. 무대가 끝날 때마다 명확하게 판정을 내리지는 않지만 연주자들끼리는 서로 알아요. 오늘 승부의 결과가 어땠는지."

- 무대 위에선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거네요. 모든 무대를 이런 마음가짐으로 임하시나요?
"마냥 그렇지도 않아요. 재즈는 대결이면서도 대화거든요. 예전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결 모드로 임했어요.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오늘 다 죽었어. 널 압살할 거야'라고 의지를 다졌는데, 그런 마음가짐도 과하면 민폐예요. 아까 말했듯이 연주에는 맥락이 있거든요. 모든 대화가 내 의견을 주장하는 토론은 아니잖아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런저런 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도 재밌지만, 서로 편하고 잘 맞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도 즐거운 것처럼 두 가지 측면 다 중요해요. 잘 아는 연주를 잘 꾸미는 것도 재즈에서 굉장히 가치 있는 일이니까요."

- 재즈 공연 무대가 스포츠 경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슷한 면이 있죠. 일단 서로의 기량을 겨룬다는 점이 그렇고요. 음악도 운동도 매일 훈련하듯이 연습해야 하고, 각종 기술을 따로 연습해서 실전에 적용하는 점도 비슷하네요. 또 연습 때 잘 되던 것도 시합 때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그래요. 스포츠 경기처럼 지켜야 하는 규칙이 많기도 하고요."

- 해설이 없다는 건 차이가 있네요.
"그래서 더 외로운 장르라고 생각해요. 비주류 장르인 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재즈를 이해하려면 알고 있어야 하는 게 많으니, 관객들이 편하게 즐기기에는 분명 진입장벽이 있죠. 관중석에서 선수들이 자기들끼리만 이해하는 게임을 하는 걸 보는 게 재미가 있겠나요? 저는 관객분들이 재즈 공연의 무드만 즐겨 주셔도 감사하다 생각해요. 다만 경기 내용을 이해하고 더 재밌게 즐기려면 리스너에게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요. 저도 재즈를 처음 배울 때 선생님들 공연을 종종 보러 갔는데, 이걸 이해하고 즐기는 데 시간이 꽤 걸렸어요."

나의 가장 큰 적은 막연함

- 음악에는 어쩌다 관심을 두게 되신 건가요?
"예전에는 음악이 그냥 너무 좋아서 시작했다고 답했어요. 틀린 말은 아닌데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로 했어요. 이런 식으로 가면 내 존재가 사라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음악을 시작했어요."

그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내가 나로서 온전히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은 내 방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체구도 작고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기에 덩치 큰 학우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당연했다. 소년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킬 발판이 필요했다.

"내가 특별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가장 희소한 것을 내 취향으로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만약 지금 제가 이 나이에 마니악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면 분명 그 음악을 듣는 내 모습이 좋아서일 거예요. 근데 그때는 진짜 그게 아니었어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들 사이에 나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릴 수 없었어요. 음악에 관심 있는 저를 특별하게 봐주던 친구가 있었어요. 그전에는 스스로가 아무런 형태도 없는 먼지같이 느껴졌는데, 그제야 스스로의 형태가 생긴 기분이었어요. 지금도 정말 고마운 친구예요."

- 그 시절에 어떤 음악을 즐겨 들었나요?
"남들이랑 똑같은 걸 듣기가 싫어서 더 센 음악, 더 희소한 음악을 찾아 들었어요. 주로 헤비메탈이랑 재즈였어요. 처음 샀던 CD가 아직도 기억나요. 용산에 있는 신나라 레코드에서 빨간 표지의 빌 에반스 도쿄 라이브 음반을 샀어요. 단순히 유명해서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반도 찾아 들었는데 하필이면 퓨전 시절 작품을 들어서 너무 어려웠던 기억이 나요. 근데 어려워도 계속 들었어요. 좋아하지 않는 것도 좋아하게 될 때까지 들었어요. 앞뒤가 바뀐 이야기 같은데 저는 이걸 믿어요. 뭐든 좋아하자고 마음먹으면 좋아져요."

- 드럼을 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고3 때 어머니께 드럼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당시 어머니 지인의 아들이 이문세 밴드에서 드럼을 치고 있었는데 그분한테 배우게 했어요. 계속 시켜봐도 괜찮은지 물어도 봐야하니까 이왕이면 아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으셨던 거죠. 그렇게 잠깐 배우다가 공부하라고 그만두게 하셨어요. 수능을 보고 난 이후에 결과가 잘 안 나오니까 그제서야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으셨죠. 저는 드럼을 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서울 재즈 아카데미에 들어갔어요."

- 재즈를 접하게 된 건 그때인가요?
"웃기게도 재즈 아카데미에서는 재즈를 안 했어요. 록밴드를 하고 싶었고 드럼의 기본기만 아카데미에서 익힌 거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재즈를 만나게 해준 건 아카데미가 맞아요. 밴드를 하고 있을 때 아카데미에서 만난 형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요즘 뭐 하고 지내냐고. 지금 록밴드를 하고 있는데 배고파 죽을 것 같다고 하소연하니까 요즘에는 행사가 답이라고 하더군요. 행사를 뛰려면 재즈를 배워야 한다고, 자기가 'JASS'라는 재즈 전문 학원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리로 오라고 했어요. 거기서 재즈를 배우고 반년 만에 일이 잡혔죠. 록밴드를 할 때는 1년 동안 30만 원 밖에 못 벌었는데, 재즈를 시작하니 달에 200만 원씩 들어왔어요. 신기했죠."

- 연습하며 힘들었던 경험이 있나요?
"솔직히 재능이 없었어요. 저는 지금 초반에 제가 목표하던 수준을 초과 달성했어요. 오죽했으면 그 당시 제 목표가 팀원들에 방해가 되지 않는 연주를 하자는 것이었어요. 밴드를 하는 내내 제 연주에 만족하지 못해서 팀원들을 방해하는 것 같았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수준이 있었어요. '드러머가 이 정도는 해야지' 하는. 그래서 정말 고행하듯이 연습했어요. 항상 무거운 마음으로 연습실에 들어갔죠. 연습 자체를 하나의 이념처럼 받아들인 것 같아요. 재미없는 거 당연하고, 신나지 않는 거 당연하고. 안정적인 수준을 갖추기 전까지는 그 마인드가 계속됐어요. 지금은 연습이 스트레스로 느껴지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에요. 그냥 숨 쉬듯 하는 습관이 된 거죠. 그때는 너무 막막했어요. 그 시절의 저를 생각하면 안쓰러울 정도예요."
 
 박태헌씨의 왼쪽 팔뚝에 해골 문신이 새겨져 있다.
ⓒ 신승민
그의 왼쪽 팔뚝에는 인내를 상징하는 해골 문신이 새겨져 있다. 좋아하던 헤비메탈 밴드 '아이언 메이든'의 마스코트를 닮아서 '에디'라고 부른다. 그는 음악을 '인내해야 하는 대상'으로 봤다. 팔 안쪽에는 눈 모양 문신이 새겨져 있다. 이 문신의 의미는 '나를 지켜보는 눈'이다. 팔에 새겨진 눈이 나를 지켜보고 있으니, 연습에 집중하지 못했는데 집중한 척하지 말라고, 연주에 만족하지 못했는데 만족하는 척하지 말라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는 "나를 옥죄는 게 내 스스로의 가치를 올리는 일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 그 시절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잘하고 있어."

- 과거로 돌아가도 같은 방식으로 연습할 건가요.
"네. 지금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거예요. 그렇게 안 했으면 여기까지 못 왔어요. 어차피 언젠가는 스스로 극복해야 할 부분이니 참고 견뎌야 해요"

- 과거의 자신에게 잘 견디는 방법을 조언한다면요?
"막연한 거 알아. 그냥 그 얘기면 될 것 같아요. 너무 막연한 거 알아. 근데 나중에 막연하지 않은 순간이 와."

- 막연함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드럼을 배울 때 '스피릿(Spirit)'을 강조하는 선생님들이 많았어요. 어떤 연주는 천재들만 할 수 있고, 흑인 드러머들의 연주에 담긴 소울은 흑인들만 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죠. 그런 추상적인 메시지가 공포로 다가올 때가 많았어요. 스피릿을 강조하는 게 더 패배주의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저들은 태생부터 다르니까 우리는 따라 할 수 없어.' 이런 이야기들이 더 절망적이에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추상적인 가치 말고 직관적인 가치를 좇으려고 했어요. 음악을 운동처럼 접근한 거죠. 내가 도달해야 하는 목표를 직관적으로 설정했어요. 단순명료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매일 꾸준히 목표를 위해 연습하는 거죠. 훌륭한 연주는 예술적 영감을 통해 툭 떨어지는 게 아니라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 나오는 것이라 믿기로 했어요."

- 아까 나온 이야기랑 비슷하네요. 재즈와 스포츠의 유사성이요.
"네. 연습에 접근하는 마인드도 스포츠랑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예술의 한 장르인 재즈를 스포츠에 비유하면 조금 냉정해 보일 수 있어요. 이기고 지는 데 집착하고, 매번 더 높은 기록을 추구하는 게 스포츠니까요. 하지만 이런 사고가 차가운 이면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에요. 운동할 때 디로딩(Deloading)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열심히 훈련을 하다가도 내가 못 견딜 정도의 강도에 다다르면 운동강도를 줄여줘야 해요. 그래야만 성장할 수 있어요. 이건 굉장히 인간적인 행위잖아요. 쉴 틈을 준다는 거니까요. 이런 사고방식이 연주 실력을 높이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됐어요."

- 새롭게 도전해 보고 싶은 것이 있나요?
"크로스핏."

- 아, 음악적인 게 아니네요?
"네. 과거에는 내 인생이 곧 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인생 안에 음악이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 벌크업 중이라서 유산소가 부족하거든요. 관절에 무리만 가지 않는다면 한번 해보고 싶어요."

재즈드러머 박태헌에게 음악은 막연한 고통을 안겨준 존재인 동시에 먼지와도 같던 자신에게 모양을 선물한 은인이다. 그는 죽는 날까지 이 모양을 더 구체화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어떤 모양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지는 않았다. 그저 최종단계의 자신을 봤을 때 참 좋은 모양이라고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고 했다. 한 음 한 음을 허투루 치지 않는 단단한 드럼 소리에서 그의 곧은 의지가 느껴졌다.

공연을 다 보고 나와서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오늘 경기에선 누가 이긴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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