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학에 빠지다 [조남대의 은퇴일기(52)]

데스크 2024. 5. 2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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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을 걷어낸 듯 맞이하는 화창한 봄날은 오랜 친구와의 재회처럼 설레게 한다. 오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역사와 문학이 숨 쉬는 원주가 아니던가. 길 위에는 문인들의 웃음소리가 봄바람에 실려 흐트러진다.

법천사지에 느티나무만 덩그러이 서 있는 모습
수운의 중심지에 설치된 흥원창이 있던 남한강과 섬강이 합류하는 지점

삼십여 명의 문인들은 설렘과 기대에 찬 목소리로 왁자지껄하다. 각자 짝을 지어 여성들은 앞쪽에, 양보의 미덕을 지닌 장년의 신사들은 뒤쪽으로 자리를 잡는다. 물, 사탕, 바나나, 초코바 같은 주전부리가 가득 담긴 비닐봉지와 뜨거워서 잡기도 거북할 정도의 커다란 시루떡 하나씩을 안겨준다. 일찍 나오느라 아침을 먹지 못한 터라 김이 나는 시루떡은 입안에서 우물거리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완두콩과 팥을 넣어 만든 떡을 이렇게 맛있게 먹어본 적이 있었던가. 행사 준비를 위해 고군분투한 분들의 손길로 오늘은 즐거움이 가득한 소풍이 되리라.

임원진 인사가 끝난 후 마이크를 넘겨받은 전임 강 회장은 오늘 견학할 곳에 대해 설명한다. 지난번 문학기행 때도 느낀 것이지만 관련되는 인물의 이름이나 작품과 연도까지도 막힘이 없다. 얼마나 많이 연구하고 답사를 하였기에 이럴까 하여 입이 절로 벌어진다. 차량 기사분은 연세가 있는 문인들을 배려하여 버스를 현장 가까이 가려다 보니 좁은 농로도, 후진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덕분에 연로한 문인들이 먼 길을 걸어야 하는 수고스러움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원주지역의 여러 곳을 답사하였지만 내 마음에 울림을 주는 곳은 법천사지와 박경리 문학공원이다. 법천사지는 원주시 부론면 명봉산 자락에 자리 잡은 곳으로 옛 선승들의 호흡이 깃든 절터다. 경기, 강원, 충청의 3개 도가 접하고 남한강과 섬강이 합류하는 수운의 요충지로 물자 이동이 활발하여 법천사를 비롯하여 대규모 사찰이 자리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넓은 절터에 주춧돌만이 당시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속삭이며 고요히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떠났지만, 법천사지의 당간지주와 지광국사탑비와 함께 오랜 세월 동안 세파를 견디느라 밑둥치가 뻥 뚫린 느티나무만이 외롭게 우뚝 서 있다. 이제 껍질만으로 그 무성한 줄기를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 마냥 대견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련해 온다. 천년의 세월 동안 주민들과 피곤한 여행객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면서 그 시절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아마 느티나무 주변이 그 당시 대웅전이 있던 장소가 아닌가 한다.

오랜 세월 세파를 견디느라 밑둥치가 뻥 뚫린 채 법천사지에 서 있는 느티나무

법천사는 고려 문종 때 지광국사가 머무르면서 큰 사찰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제일 위쪽에 자리 잡은 지광국사탑비는 어른 키의 3배나 됨직한 규모로 서 있어 주변을 압도한다. 섬세하고 화려하게 새겨진 연꽃, 구름, 용 같은 조각 예술은 국보 제59호로 지정될 정도로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법천사지 제일 위부분에 서 있는 지광국사 탑비
어른키 3배나 되는 지광국사 탑비

맞은편에는 지광국사탑이 놓여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수탈되어 현해탄을 건너갔다. 우여곡절 끝에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한국전쟁 때 상륜부가 포탄을 맞아 1만2천 조각으로 찢기는 상처를 입었다. 탑 안에 모셔져 있는 스님의 영혼은 한순간도 편안한 날이 없었으리라. 113년 동안 1,975킬로를 떠돌던 국보 제101호인 탑은 원주시민들의 끈질긴 요청으로 국립문화재연구원에서 복원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마무리 준비를 하고 있단다. 물건이 본래의 임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환기본처'(還歸本處:) 주장이 공감을 얻은 모양이다. 긴 세월 동안 수난을 당하던 지광국사의 영혼이 보금자리였던 탑을 만나 그동안 겪었던 아픔이 치유되기를 기원해 본다.

1930년대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전경
지광국사탑이 돌아오면 설치하기 위해 건축한 법천사지유적전시관

박경리 문학공원은 시내로 30여 분을 달려야 한다. 공원 안에는 선생의 옛집과 마당에는 호미와 책을 옆에 두고 쉬고 있는 동상, 북카페와 문학의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사위 김지하 시인의 옥바라지를 위해 서울 성북구 정릉동 골짜기의 아담한 집을 정리하고 원주로 내려왔다. 당시의 마음은 얼마나 착잡하고 아렸을까. 그 마음을 달래며 이곳에서 글쓰기에 매진하여 토지 4.5부를 쓰고 대미를 장식했다. 담배를 즐겨 피우셨다니 이것도 애타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것이 아닐까. 옛집 현관에 들어서면 커다란 액자에 수더분한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다. 꾸밈없는 시골 할머니처럼 보이는 이 사진을 생전에 제일 좋아하셨단다.

박경리 선생 옛집 마당에 설치된 동상
옛집 현관에 걸려있는 수더분한 모습의 박경리 선생 사진

손주들과 다정하게 촬영한 사진을 보자 해외에 있는 우리 손주들 보고픈 마음과 겹쳐져 눈시울이 붉어진다. 특히 현관 앞 돌을 깔아 만든 조그만 웅덩이가 눈길을 끈다. 물장난하며 놀 때 다치지 않도록 몽돌로 만든 마음 씀씀이에 손주들을 향한 사랑이 깊이 배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손주들과 다정스럽게 앉아 있는 박경리 선생
옛집 입구에 손주들의 물놀이를 위해 몽돌로 만든 조그만 웅덩이

옛집 옆에는 5층으로 된 '박경리 문학의 집'이 있다. 건물 외벽에는 '朴景利'라고 세로로 흘려 쓴 글씨가 눈길을 끈다. 선생의 성격이 배어 있는 손수 쓴 글씨체리라. 토지의 육필원고와 만년필, 농사지을 때 쓰던 호미와 장갑과 토지 전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4반세기가 넘는 26년의 집필 기간 끝에 스물한 권이나 되는 대하소설이 탄생했다. 거의 한세대라는 긴 세월 동안 열정을 쏟아부었다는 것은 옹골찬 끈기와 집념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개가 숙여지고 숙연해진다. 나는 어떤 일에 이런 열정을 갖고 빠져 본 적이 있었던가. 고개를 가로졌는다. 문학비평가들이 한국문단에서 가장 빼어난 작품이라고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박경리 문학공원은 연간 10만 명 이상이나 방문하는 명소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문학적 영감과 자신의 삶과 가치관을 성찰하는 기회를 얻는 등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박경리 문학의집 앞에서 단체사진을 촬영하는 서초문인협회 회원들
박경리 문학의집에 전시된 선생의 육필원고

지광국사탑비는 천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한 곳에서 흥망성쇠 지켜봤다. 한 세기를 떠돌다 고향으로 돌아올 자신의 탑을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할까. 아마 "이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라고 하지 않을까. 박경리 선생은 4반세기가 넘는 긴 세월 동안 수없이 밤을 새우며 식사마저 잊은 채 펜을 잡고 놓을 줄 몰랐다. 그 결과 우리 민족의 가장 위대한 소설인 '토지'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으리라. 깊은 감동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세월의 강을 건너는 데는 이런 노력과 인내가 필요한가 보다. 높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문학기행에 빠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모양이다. 고든 리빙스턴은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에 너무 늦었을 때란 없다"라고 한 말을 새겨들으며 마음을 다잡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조남대작가 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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