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에서 "네네" 하던 며느리는 이제 없습니다

문수진 2024. 5. 2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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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금치 무치며 하는 생각... 거절하는 법을 배울 때 관계는 더 건강해진다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문수진 기자]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은 시금치 무침을 좋아한다. 다른 야채들은 잘 안 먹는데, 시금치 무침을 해 놓으면 접시에 담기도 전에 달려온다. 간이 잘 됐느니, 참기름이 약간 부족하느니 하며 옆에서 훈수도 둔다. 아들 덕에 나는 마트에 갈 때마다 시금치를 사오곤 한다.

시금치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모임을 같이 하는 동생인데,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다정하고 순해서 오랫동안 인연을 유지하고 있다. 동생은 아픈 시어머니가 자신을 향해 내뱉는 독한 말에 매번 상처 받고 있었다. 잘 모셔야 한다는 의무감과 어느 형제도 시어머니를 돌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로, 갑자기 살이 찌기 시작한 동생은 위장약과 두통약을 달고 살았다.

시금치의 '시'자도 싫다는 동생
 
 시금치(자료사진).
ⓒ 픽사베이
  
동생과는 두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보는데, 지난 모임에서 신경과 약을 먹고 있다는 말을 해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얼마 전 다시 본 동생의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붓고 우울했던 얼굴은 사라지고 환해졌다.

"와, 너 너무 예뻐졌다. 살이 많이 빠진 거 같은데?"
"20킬로그램 뺐어요."

"진짜 대단하다. 최고다. 너. 멋있어."
"언니,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아세요? 우리 시누이들은 나한테 살 빠졌다는 말 안 해요."

"정말? 널 보고 아무 소리도 안 했다고? 이렇게 살이 많이 빠졌는데?"
"그러니까요. 시어머니 만나러 와서는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가버려요."

"와, 진짜 너무하는 거 아냐?"
"제 말이요. 저 정말 힘들게 살 빼고 있거든요. 동네 아줌마들도 살 많이 빠졌다고 하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오는 시누이들은 아무 말도 안 해요. 이번에 정이 뚝 떨어졌어요. 윽~ 저는요, 요즘 시금치의 '시'자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니까요. 그래서 저 시금치도 안 먹잖아요. 시댁 너무 싫어요."

동생 말을 들으니 떠오른 비슷한 경험. 마흔 살에 셋째를 낳고, 백일쯤 되었을 때 급성방광염으로 응급실에 갔다 왔다. 겨우 나아졌나 했는데 바로 신종 플루에 걸렸고, 와중에 5살 큰딸과 3살 아들, 막내까지 돌보느라 정신이 없을 때였다. 타미플루를 다 먹고 나니 위아래 입술에 물집에 가득 잡혔고, 물집이 터지면서 피고름이 흘렀다. 입을 크게 벌릴 수도 없어서 물과 이온음료만 마시고 있었던 어느 겨울이었다.

마침 시댁에서 제사가 있었다. 시어머니와 시누이, 큰형님이 부엌에서 제사 준비를 했다. 나도 옆에 앉아서 그들과 똑같이 일했다. 인사를 하면서 눈이 마주쳤지만, 약속한 것처럼 서로 자기들 힘들었던 이야기만 늘어놓느라 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그러다 마트에 콩나물을 사러 가는데 친정 숙모를 만났다. 그 분이 날 보고 건네신 말.

"수진아."
"숙모. 오랜만이예요. 잘 지내셨어요?"
"어, 나야, 뭐 항상 똑같지. 그런데 너 얼굴이 왜 그래? 아고... 잘도 아파났구나게(아팠나보구나). 지금은 어떵, 괜찮고?"

그 말을 듣는데 왜인지 눈물이 쏟아졌다. 가깝지도 않고, 별 느낌도 없었던 친정 오촌 당숙모 앞에서 아이처럼 엉엉 울고 말았다. 숙모는 갑작스러웠을 텐데도 아무 말 없이 등을 토닥여주었다. 다 큰 어른이 콩나물 봉지를 들고 길거리에서 안겨 울었다.

나는 눈물을 닦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때 얼마나 서럽던지 시댁의 시 자만 들어도 경기가 일어날 지경이었다. 시금치는 쳐다보기도 싫다던 동생의 마음도 나와 같지 않았을까.

시금치를 무치며 보내는 마음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결혼 초기 시댁에서 무조건 "네네"라고만 대답하던, 순진한 며느리가 더는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간 아이 셋을 키우면서 내공이 생긴 건지, 나이가 들면서 뻔뻔해진 탓인지, 이제는 시어머니께도 할 말은 하고, 못 하겠는 건 못 하겠다고 거절도 한다.

내게서 처음 '못 하겠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시어머니 표정을 보니 많이 놀라신 것 같았다. 실은 그 말을 하면서 나도 두렵고 떨렸다. 그러나 미움받을 것이 두려워서 계속 속이고 살다간 내 속이 남아나지 않을 것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떨렸지만 용기 내어 말할 수밖에 없었다.
 
 거절(자료사진).
ⓒ 픽사베이
가정의 달이라는 5월.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만나는 일이 잦아지다 보면 골치가 지끈거릴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시금치를 삶는다. 맛있고, 영양가 만점이지만, 첫 글자가 시댁과 같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는 시금치. 그 시금치를 무쳐 먹는다.

살짝 데친 시금치를 찬물에 헹구고, 손으로 꾹 차서 참기름과 간장, 깨를 넣고 양념하며 생각한다. 차마 앞에서는 하지 못했던 말들, 속으로 삼켰던 말들을 되새긴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은 참고, 도저히 안 되는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기로 결심한다.

시금치에 참기름향이 고소하게 퍼져나가면 아이들이 부엌에 들어와 아기 새처럼 작은 입을 내민다. 무치던 손으로 시금치를 집어 입에 넣어주면, 오물오물 씹던 아이들이 '엄지 척'을 한다.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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