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매일 죽음을 생각할까

박은영 2024. 5. 20.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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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영 기자]

내가 처음 죽음을 인식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봄의 일이다. 당시 나는 부부가 경영하는 동네의 작은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짧은 머리가 잘 어울렸던 선생님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선생님의 남편은 성악을 전공한 분이었는데 동그란 안경을 쓰시고 늘 자상한 웃음을 지으시던 분이셨다.

5월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느 날 학교를 다녀와 학원 가방을 챙겨 들고 현관을 나서는데 엄마가 나를 불러 세웠다.

"은영아, 오늘은 피아노 학원에 갈 수 없어." 
"왜?"
"그게... 선생님의 남편이... 사고를 당해서 천국에 가셨단다."

그날은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고속도로에서 남편분이 몰던 경차가 버스와 부딪히는 사고가 나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엄마 손을 잡고 찾아간 장례식장.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선생님과, 그런 선생님 품에 꼭 안긴 어린 딸의 모습이 내가 처음 죽음과 만났던 순간의 기억이다.
 
 어린 시절에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두렵고 무서웠다.
ⓒ pixabay
 
그 이후 나는 종종 누군가가 죽는 꿈을 꿨다. 그 대상은 부모님일 때도 형제일 때도 혹은 나 자신일 때도 있었다. 죽음을 꿈꾼 다음 날 아침에는 미처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검은 구름처럼 밀려왔다. 그러나 어린 나에게 죽음이란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금기어처럼 느껴져, 나는 그 꿈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중학생이 된 이후에도 나는 몇몇 사람을 아무런 준비 없이 떠나보내야 했다. 그중에는 노화와 질병으로 명을 달리 한 분들도 있었지만, 친구의 오빠이거나 신혼 여행지로 향하던 동네 언니일 때도 있었다. 죽음은 나이와 상관없이 누군가를 순식간에 내 곁에서 데려간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불청객 같은 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야 들여야 할지 몰라 오랜 시간 당혹감을 느꼈다. 사춘기 시절의 나는 어두운 밤 침대에 누운 채, 종종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 밤은 참 어둡고 길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쿼블로 로스(1926-2004)는 오랜 시간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관찰하며 죽음에 관한 여러 저서들을 남겼다. 그녀는 환자들이 대개 5가지 심리적 단계를 통해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분석했다.

슬픔의 5단계, 혹은 분노의 5단계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것은 부정-분노-타협(흥정)-우울-수용으로 구분된다. 오늘날 쿼블로 로스가 제안한 이 모델은 죽음을 앞둔 환자는 물론, 소중한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의 심리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고는 한다. 

여기 죽음을 앞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먼저 자신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다음으로 강한 분노를 느낀다. 분노의 대상은 죽음 그 자체일 때도, 본인 혹은 타인일 경우도 있다. 분노가 사그라지면 그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대상, 이를테면 의사나 가족 혹은 신(神)에게 삶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요구하거나 흥정을 시도한다.

이 시도가 불가능으로 돌아가면 깊은 우울의 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수용의 단계에 이르면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남은 시간 동안 의미 있는 일을 하거나, 조용히 삶을 정리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슬픔의 5단계. 인간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 calmerry.com
어린 아이에서 중년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죽음에 대한 나의 감정도 위와 비슷한 단계를 걸쳐 변화해 왔다. 그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났다. 그때마다 나는 상실감과 우울감에 휩싸였지만, 결국은 모든 이의 종착역인 죽음을 겸허히 수용하는 결말을 맞이했다. 그렇게 나는 종종 아니 자주 죽음을 떠올리는 중년이 되었다. 
내 방 침실 협탁에는 잠들기 전 들춰보는 책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서울대 김영민 교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는 산문집이다.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아침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노을을 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좋지 않다. 술잔을 앞에 놓고 죽음에 압도되는 것은 좋지 않다. 천장을 바라보며 죽음의 충동에 시달리는 것은 좋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 단련된 마음의 근육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죽음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죽음을 삶으로부터 몰아낼 수 있다. 삶을 병들게 하는 뻔뻔한 언어들과 번쩍이는 가짜 욕망들을 잠시 몰아낼 수 있다. 아침에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선진국에 대해서, 랭킹에 대해서, 입시에 대해서, 커리어에 대해서, 무분별한 선동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아니, 그것들에 대해 좀 더 잘 생각할 수 있다. (11쪽)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통해 나는 삶에 대해 좀 더 잘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사사로운 정념으로부터 해방되고,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통해 삶에 대한 새로운 기대와 감사로 마음이 채워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삶을 더 잘 생각할 수 있게 된다
ⓒ pixabay
 
오늘날 죽음이란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모두가 100세 시대를 꿈꾼다는 요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잘 먹고 잘 사는 법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 잘 관리된 청년 같은 노년이 되기를 선망하며, 의술의 힘을 빌려 인간의 인체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지워가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모든 이에게 찾아오는 법.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하기에는 죽음은 불청객을 가장한 귀빈(VIP)같은 존재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가? 당신은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1828-1910)는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가끔씩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대도 머지않아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 생각하라. 그대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거나 심각한 번민에 빠져있을 때라도, 당장 오늘 밤이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그 번민은 곧 해결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상쾌하게 일어나, 잘 단련된 마음의 근육으로 죽음을 생각한다. 오늘 하루 내게 허락된 인생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서. 내게 주어진 사람들을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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