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사] “우리 세대에 세계 복음화를!”

신상목 2024. 5. 20.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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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더미션입니다.
오늘도 복되고 찬란한 하루가 되시길 바래봅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사 이야기에도 풍성한 스토리로 가득합니다. 17세기 아메리칸 원주민, 특히 모히칸족 인디언을 위해 그들의 언어를 배워 성경을 번역한 존 엘리엇, 프로야구 선수로 활약하다 미국 최고 부흥사가 된 빌리 선데이,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를 잇는 이탈리아의 전 종교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19세기 수많은 기독 젊은이들에게 “우리 세대에 세계 복음화를”이란 구호를 외치며 수많은 대학생을 선교 현장에 파송한 존 모트 등을 만나보십시오.

기독교 역사가인 후스토 곤잘레스는 “각 세대는 마치 거대한 인간 피라미드에서처럼 그 전 세대들의 어깨 위에 서 있는 곡예사들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교회 역사는 곧 우리가 딛고 있는 전 세대의 어깨이자 발판인 셈이지요. 우리는 다음세대에게 어떤 ‘어깨’가 돼줄 수 있을까요.

325년 5월 20일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에게 종속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단인 아리우스주의를 논의하기 위해 비티니아의 니케아(현 이즈닉)에서 최초의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 개회식에서 “여러분 사이에 불화의 원인을 제거하고 평화를 구축할 것을 간청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공의회는 아리우스를 파문하고 그의 모든 책을 불태우라고 명령함으로써 격렬한 갈등을 해결하려 했지만 갈등은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모히칸족 인디언 선교사
1690년 5월 20일 뉴잉글랜드의 아메리카 원주민 선교사이자 미국에서 최초로 인쇄된 성경의 발행인이었던 존 엘리엇(1604~1690)이 사망합니다. 엘리엇은 영국 태생으로 1631년 11월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매사추세츠로 이민을 왔습니다. 그는 이웃인 원주민 인디언들의 복음화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1646년 모히칸족 사회에서 원주민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인디언들은 이스라엘의 사라진 열 지파이며 이들을 회심시키면 성경의 예언들이 성취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는 개종자들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통치하는 마을에 수용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유럽식 농업 방식과 공학을 가르쳐 공동체들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강조했는데 엘리엇은 모히칸어를 배우고 그것을 기록하는 방법을 고안한 후 성경을 모히칸어로 번역했습니다. 엘리엇은 이런 마을을 14개나 설립했고 그의 감화를 받은 추종자들은 더 많은 마을을 세웠습니다.

1738년 5월 21일 형과 함께 감리교를 공동 창립한 찰스 웨슬리가 늑막염으로 투병하던 중 복음주의적 회심을 경험합니다. 병상에서 그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믿으라 그리하면 네 병이 나으리라”는 신비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1년 후 이날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찬송 ‘만 입이 내게 있으면(O for a thousand tongues to sing)’을 작곡했습니다.

교도소 선교의 원조? 엘리자베스 프라이
1780년 5월 21일 영국 퀘이커교도이자 사회 개혁가인 엘리자베스 프라이가 영국 노리치에서 태어납니다. 교육에서 빈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개혁에 참여했지만, 그녀의 가장 큰 임무는 감옥 생활을 개선하는 것이었습니다.

은행가이며 상인인 부유한 퀘이커교도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런던의 차(茶) 상인 조지프 프라이와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유럽에서 교도소 개선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며 영국 병원제도와 정신병자 처우를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대가족을 보살피면서 사역 활동을 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돌보아 퀘이커교로부터 ‘목사’로 인정받았고, 이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북부, 아일랜드 등을 돌아다니며 현지 교도소들을 조사하고 이에 대해 제안하는 보고서를 썼습니다. 그녀가 내놓은 제안들은 그녀가 죽기 직전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점차 실현되었다고 합니다.

최초의 미국 장로교 총회
1789년 5월 21일 최초의 미국 장로교 총회가 필라델피아 제2장로교회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총회는 교단 명칭을 ‘미합중국 장로교단(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PCUSA)이라 정하고 교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와 대소요리문답서를 신앙의 기본으로 채택했습니다.

미국 장로교는 1861년부터 1865년에 이르는 기간에 노예제 문제로 남장로교(PCUS)와 북장로교(UPCUSA)로 갈라졌다가 1983년 6월 130년 만에 재통합되었습니다. 이후부터 ‘미국장로교 (PCUSA)’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매일 15분씩 하나님과 만나라, 그리고 전하라” 빌리 선데이
1883년 5월 22일 프로야구 선수로 활약한 후 미국 최고의 부흥사가 된 빌리 선데이가 메이저 리드 시카고 화이트 스타킹스 소속으로 첫 타석에 섰습니다. 본명은 윌리엄 애쉴리 선데이(1862~1935)로 1880년대 미국 야구 내셔널 리그 외야수였으며 20세기의 초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독일 이민자의 아들로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출생했습니다. 펜실베이니아주 챔버스버그에 살았을 때 이름을 선데이(Sunday)로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지 5주 만에 아버지는 병으로 죽습니다. 빌리가 10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빌리와 형을 보육원에 보냈습니다. 빌리는 보육원에서 자라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기초교육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운동을 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빌리는 1880년 아이오와주 마셜 도시로 이주하면서 야구 선수가 됩니다. 2년 후 1882년 빌리가 속한 마셜 도시 팀이 주 챔피언 팀을 이겼고 빌리는 1883년 메이저 리그의 프로야구팀인 시카고 화이트 스타킹 소(Chicago White Stockings)의 선수가 됩니다. 그가 전성기 세운 도루 기록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야구선수였지만 술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1886년 어느 주일, 빌리는 해리 먼로가 인도하는 시카고 퍼시픽 가든 전도 집회에 참석했다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이후 빌리는 야구를 그만두고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때 어린 시절 교회 목사님이 하신 말씀을 회상합니다.

“매일 15분씩 말씀을 들으라(성경 읽기). 매일 15분씩 하나님과 이야기 하라(기도). 매일 15분씩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라(전도). 매일 15분씩 희생적인 사랑의 행동을 보이라(사랑 실천). 그러면 너는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이다.”

그는 평생 이 말씀을 실천했다고 합니다. 빌리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설교자였으며 음주 등의 죄악들에 대해 칼로 찌르듯 강력하게 책망했습니다. 그는 많은 반대자로부터 ‘최악의 설교자’라는 혹평을 듣지만, 동시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사도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1891년 빌리 선데이는 YMCA 전도사로서 목회 전선에 뛰어들었고 윌버 채프먼과 협력하면서 수많은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빌리 선데이는 1903년에 장로교 목사로 안수받은 후 부흥사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1억명가량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빌리 선데이는 1910~1920년대,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논쟁으로 전례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국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희망을 제시했습니다. 그가 제시한 희망은 단순히 종교적 차원을 넘어 미국의 희망으로 자리 잡았고, 희망을 꿈꾸던 미국인들은 빌리 선데이를 환영했습니다. 특히 그의 죄에 대한 메시지는 강력했습니다.

“나는 죄와 싸우겠다. 발이 있는 한 죄를 차버리겠고, 주먹을 가지고 있는 한 죄를 쳐버리겠고, 머리를 가지고 있는 한 죄를 받아 버리겠고, 치아를 가지고 있는 한 죄를 물어뜯겠다. 내가 늙어서 주먹도 치아도 힘도 없다면 영광의 집에 들어갈 때까지 잇몸으로라도 죄를 이기겠다.”

당시 미국 전역에 21만 8000개의 술집이 있었고 술 문제는 국가적인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빌리 선데이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위스키와 맥주가 그곳에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곳은 다름 아닌 바로 지옥입니다. 술집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여러분 금주에 동참하시지 않겠습니까. 보스턴 시민 여러분, 매사추세츠주와 국민 여러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운동에 동참하시겠다고 약속하시겠습니까. 일어서십시오. 술집은 거짓말쟁이들입니다. 술이 건강에 좋다고 하지만 사실은 병을 가져다줍니다. 번영을 약속하지만 역경을 낳습니다. 행복을 약속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불행을 가져다줍니다.”

그는 술의 악영향에 대해 조심해야 할 것을 말하면서 심지어 “하나님의 저주가 술집에 임할 것, 기독교와 애국이 동의어이듯 지옥과 술집은 동의어”라는 말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빌리는 보수적 신학을 가진 근본주의자이자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동조하는 복음주의자였으며 공화당과 1차 세계대전을 지지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전 종교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1498년 5월 23일 이탈리아 북부 교회와 사회의 부패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교한 이탈리아 개혁가이자 피렌체 성마가수도원 원장인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이단 혐의로 교수형에 처하고 시신이 불태워집니다. 그는 영국의 존 위클리프, 보헤미아(체코)의 얀 후스에 이어 이탈리아의 전 종교개혁가로 분류됩니다.

그는 성마가 수도원에 가입 후 동료 수도사들에게 성경을 강해했습니다. 강해는 설교가 됐고 그는 당시 사회악에 대한 비판, 진정한 기독교인의 생활과 향락에 찬 사치의 대조 등을 설파했습니다. 수도원 원장이 됐을 때는 수도원 재산 대부분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줬습니다. 또 수도원 내 생활을 대대적으로 개혁했습니다. 그들의 변화된 모습은 시민들에게고 큰 호응을 얻었고 피렌체의 실질적 소유자였던 로렌조 데 메디치도 임종 시 사보나롤라에게 자신을 돌봐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학문 연구야말로 개혁의 중심이 돼야 할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성마가 수도사에게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아랍어 갈대아어 등을 공부시켰고 당시 부유한 자들이 추구했던 사치와 향락이 허영이라고 여기고 물질 탐욕이야말로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에 따라 정기적으로 ‘허영의 화형식’이 거행됐습니다. 중앙 광장에 나무로 만든 피라미드를 설치해 시민들이 그들의 허영들을 갖다 버리게 했습니다. 사치스러운 의복, 보석, 가발, 값비싼 가구 등을 시민들을 버렸고 찬양과 행진을 하면서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사보나롤라는 정치적 상황으로 궁지에 몰렸습니다. 특히 평소 그를 싫어했던 부유층은 그의 정책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사보나롤라가 예언자라고 확신했고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언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 적이 없었습니다.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도 당시 그의 설교를 듣고 “시류에 편승하고 거짓을 둘러댄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당국은 그를 심문했으나 뚜렷한 혐의가 없자 그의 두 추종자를 이단이자 분파주의자로 정죄하면서 유일한 자비로 화형에 처하기 전 이들을 미리 교수형에 처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세 명은 모두 용감하게 죽음을 맞았고 당국은 시민들에게 이들의 기억을 없애기 위한 조치로 시체의 재를 아노강에 뿌렸습니다.

1854년 5월 24일 장로교인들이 미국 최초의 흑인 대학인 펜실베이니아의 링컨 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1824년 5월 25일 필라델피아의 주일 및 성인 주일학교 연합회가 미국 주일학교 연합회를 설립합니다. 이 단체는 주일학교를 "인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기독교적 가치와 민주주의적 가치를 심어주는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1970년 미국선교협회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우리 세대에 세계 복음화를!”
1865년 5월 25일 전도자이자 에큐메니스트인 존 R. 모트가 미국 뉴욕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YMCA에서 40년간 봉사했으며(이 단체가 여전히 공격적인 전도 활동을 벌이고 있을 때) 1910년 에든버러 선교대회 의장을 맡았고 창립 회의에서 세계교회협의회 명예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엄격하게는 한순간도 실제 선교사였던 적은 없었으나 그의 영향력은 엄청났습니다. 1888년 해외선교를 위한 대학생 자원운동을 공식 조직했으며 30년 이상 이 조직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미국 전역의 대학 캠퍼스를 다니며 대학생들에게 선교에 대한 도전을 던졌습니다. 특히 감동적인 호소였던 “세계 복음화를 우리 세대에!”를 외쳤습니다.

선교 행정가로서 그를 빛나게 한 순간은 에든버러 선교대회였습니다. 이 대회는 모트가 개최하고 의장을 맡아 1355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10일간 진행됐습니다. 이 대회는 최초의 초교파적, 세계적 선교 대회였습니다. 이를 통해 수십 년에 걸쳐 에큐메니컬 운동이 구체적 형태를 갖추게 됐습니다. 당시 전 세계에 4만5000여명의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30년 후엔 그 수가 3배를 뛰어넘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수많은 나라와 지역을 다녔음에도 철저히 가정적인 사람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아내 릴라는 늘 그와 동행하며 동역했습니다. 여대생 단체와 전 세계 여성 선교사들을 섬기며 62년을 함께했습니다. 존 모트는 죽음을 앞두고 한 기자에게 “죽음은 기차를 바꿔 타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1955년 1월 31일 기차를 바꿔 탔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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