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 시대 자취생들이 해먹는 '닭밥야'의 정체

정누리 2024. 5.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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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물가가 1인가구에 미치는 영향... 웅녀처럼 100일 간 먹고 산 닭가슴살, 밥, 야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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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누리 기자]

 닭밥야
ⓒ 정누리
 
곰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100일간 쑥과 마늘만 먹었다는데, 20대 자취생인 난 사람처럼 살아남고자 3개월째 닭밥야('닭가슴살, 밥, 야채'의 줄임말, 아래 '닭밥야')만 먹고 있다. 바깥세상이 온통 고물가 이슈로 시끄러운 탓이다. 사과 한 알에 7000원인 시대. 수박 한 통에 4만 원인 요즘. 

이런 가격들이 이제는 더 놀랍지도 않다. 사과도 수박도 안 먹은 지 오래다. 내가 먹는 것은 오로지 닭가슴살과 밥, 간단한 채소뿐. 이것이 고물가 시대에 살아남는 1인가구 자취생 나만의 방법이다. 

일어나면 자동으로 하는 식사 루틴

'오늘 뭐 먹지?'라는 생각을 어느 순간부터 안 하게 됐다. 아침에 일어나면 로봇처럼 냉동실을 연다. 닭가슴살 한 팩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해동한다. 즉석밥도 데운다. 그 사이 냉장고에서 밀폐용기에 담아놓은 양배추 무침을 한 젓가락 덜어낸다. 모두 밥그릇에 담고, 한 번 더 데우면 식사 준비 끝.

직접 나가 오프라인으로 장을 안 본 지도 오래다. 닭가슴살은 특가일 때 온라인에서 100개 단위로 사놓고, 즉석밥도 찬장에 한가득이다. 기껏해야 채소 사러 어쩌다 한 번씩 나갈 뿐이다. 좀비가 와도 이 집에서 3개월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내 주방은 간단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다.
 
 라멘
ⓒ 정누리
 
오해할까 싶어 덧붙이자면, 내가 요리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예전에는 자주 집밥을 해먹었다. 채소도 일일이 썰어 볶음밥을 해먹고, 라멘도 끓이고, 양갈비도 구워 먹었다. 샐러드도 믹스를 사면 될 것을, 직접 하나하나 씻어 탈수기에 돌려 먹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로 나의 기조는 조금 바뀌었다. 겨울잠에 드는 다람쥐처럼, 생존과 경제로 방향을 튼다.

식사보다도 '섭취'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하필 '닭밥야'인 이유는? 그 와중에도 내 몸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은 마음 때문이다. 부모님 세대야 정말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어 라면으로 한 끼를 때웠다고 하지만, 이미 좋은 것 맛있는 것을 다 맛본 나는 비상상황 와중에도 영양성분은 제대로 꾸린다.

이런 생각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이미 내 또래 자취생들에게 '닭밥야', '닭고야(닭가슴살, 고구마, 야채)' 등이 으레 쓰는 줄임말인 것을 보면 말이다.

'야채 주식' 매일 검색합니다
 
 양배추
ⓒ 정누리
 
웅녀처럼 동굴에 들어가 햇빛을 기다리는 난 작은 굴 속에서도 나름의 재미를 찾는다. 그중 하나는 '야채 주식'이다.

사람들은 매일 아침 경제면 주식장을 보지만, 난 우리 지역 장바구니 물가 정보를 검색한다. 식재료 값이 오르면 뉴스에서 크게 보도하지만, 값이 낮아진 식재료 품목은 상대적으로 덜 보도된다. 

그럴 때 농산물유통정보 등에 들어가 농산물 소매가격을 지역별로, 기간별로 찾아보면 일별로 가격 변동을 알 수 있다. 지역신문에서 이를 도표로 해석해 전주·전년대비 그래프로 올리기도 한다. 잘 찾아보면 저번주 대비 낮아진 식재료들이 있다. 자취생에겐 나름의 찬스이자 기회다. 

오호라, 검색해보니 오늘은 깐 마늘이다. 닭가슴살을 다진 마늘과 간장에 볶아 먹어 볼까. '어떻게 조리해 먹지'라는 걱정은 없다. 인터넷에 치면 5분 자취생 레시피가 한가득 나오기 때문에.

그 외에 똑같은 '닭밥야'더라도, 레시피를 나름 변형하기도 한다. 닭가슴살을 소스닭으로 바꾸거나, 직접 밥솥에 수비드(Sous vide·밀봉 뒤 데워먹기) 해먹거나, 시즈닝을 뿌려 먹기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온라인에서 각종 시즈닝을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데, 80g 정도만 시켜도 나 같은 1인가구는 근 1년은 써먹을 수 있다. 양배추가 비싸면 김이나 김치에 싸 먹고, 상추와 치커리를 키우는 지인에게 나눔도 받는다. 지역 중고거래 어플에도 과거에는 옷이나 게임기를 검색했다면, 이제는 부추나 얼갈이 등의 채소를 검색하고는 한다. 저렴하게 파는 지역 농부들이 있기 때문이다.

고물가 시대에 돈을 아끼자고 시작한 일인데 오히려 일상이 간단하고 건강해지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엄마는 내게 "웬 종일 닭밥야만 어떻게 먹냐"라고 혀를 내두른다. 엄마는 내가 맛없는 것을 견디고 참는 줄 알지만, 난 명백히 알 수 있다. 난 지금 이 생활을 즐기고 있다. 매일이 즐겁다.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웅녀도 굴 속에서 쑥과 마늘을 구워도 보고, 무쳐 먹기도 하지 않았을까?'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몇 십일을 버틴단 말인가. 생쑥과 생마늘만 먹어서는 속 쓰리고 지겨워서 안 된다. 분명 곰은 그 진득한 마음으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다 나름대로 굴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이 시대의 청년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햄릿처럼 "죽느냐 사느냐"라며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배수진을 치지도 않는다. 그저 중간에 숨어있는 촘촘한 방법 하나하나를 창의적으로 찾아낸다. 사회 속에 껴있는 애매한 초년생의 위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우리는 누구에게 소속되어있지도, 누구를 책임지지도 않는 1인 가구이기 때문이다. 

연일 치솟기만 고물가 시대, 항상 뉴스는 어렵고 무거운 얘기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소음에서 멀어져서 나 홀로 이 굴 속에서 고요하고 싶다. 온전히 나만을 들여다보고 싶다.

그렇게 간단하고 삼삼하게 살다 보면, 돌고 도는 햇빛은 필시 나를 찾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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