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세의 피아니스트가 '끝'을 말하지 않는 이유

라효진 2024. 5. 18.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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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하는 백건우의 음악 인생.

열 살부터 피아노를 쳤으니 벌써 68년 경력입니다. 세월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머리칼을 한 황혼의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여전히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음반을 낸 게 불과 2년 전이니 말이죠. 그런 그가 뜻밖의 행보로 대중 앞에 나섰어요. 백건우의 '초심'인 모차르트를 음악 인생 최초로 선보입니다.

백건우는 16일 '모차르트 3부작' 중 파트1을 발매하며 전국 리사이틀을 앞두고 기자간담회를 열었습니다. 이날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음악회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고 털어 놓으면서도, 지금은 음악을 하는 것만으로 굉장히 충만하다고 운을 뗐습니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모차르트로 음악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경력이 쌓인 후 모차르트를 돌아보는 음악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백건우는 그 동안 숱하게 연주했을 모차르트의 곡들을 '지금에야' 발표하는 이유를 '귀향'이라 설명합니다.

"사람들이 나이를 먹으면 고향을 찾는다고 하잖아요. 음악도 비슷한 것 같아요. 베토벤, 모차르트로 시작해서 모던, 컨템포러리 등 다양한 장르까지 갔다가 다시 기본(클래식)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닐까요?"

백건우는 이날 과거에 비해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 우선은 모차르트의 곡을 듣고, 악보를 읽는 스스로가 달라졌습니다. "지금 나한테 들리는, 보이는 모차르트가 굉장히 새롭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새로운 도전이 될 수도 있겠죠? 예전에는 모차르트를 스타일에 맞게 잘 치는 것이 '도전'이었다면, 지금은 모차르트의 음악 그 자체를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백건우가 모차르트와 함께 '고향'을 말하고, 더불어 어린아이의 깨끗한 마음을 이야기하는 건 작곡가 특유의 '순수함' 때문입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피아니스트로서의 개성과 특별함 대신, 음악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최고라고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은 "모차르트의 음악은 아이가 치기엔 너무 쉽고 어른이 치기엔 너무 어렵다"라고 했죠. 이 같은 모차르트의 순수를 앨범에 오롯이 담기 위해, 백건우는 표지도 아이들의 손에 맡겼습니다.

"어린아이의 눈길이 그리웠어요. 모차르트의 음악과 딱 맞는, 아이들만이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겠다 싶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표지 공모 아이디어를 냈죠. 여러 그림이 있었는데, 표지로 채택된 그림을 보면 하양, 까망, 빨강 세 가지 색부터 강렬하고 선에 생명력이 있어요. 열 살 짜리 아이가 그린 그림이에요."

백건우는 날이 갈수록 '치장 없이' 악보에 담긴 음 그대로를 전하는 게 가장 힘든 일이라 느낍니다. 그러나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아와 개성을 깎아내고 순수한 음을 연주하는 건 오히려 백건우의 궁극적 목적이 됐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모차르트 앨범에는 피아노 소나타 16번(Piano Sonata No. 16 in C Major, K. 545)를 수록했습니다. 비교적 난이도가 높지 않아 입문자들이 배우기도 좋죠. 백건우는 이 곡으로 유럽에서 사사한 피아니스트 빌헬름 켐프를 떠올렸습니다.

"예전에는 어떤 곡을 연주할 때 무언가를 보여줘야만 한다는 마음이 있었고, 다른 사람이 연주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음악 외 조건을 많이 생각했어요. 이제는 그런 것들을 다 없애고, 순수한 전달이 목적이죠. 내가 (빌헬름) 켐프 선생하고 공부할 때, 어느 날 학생들을 위해서 연주한 곡에서 그 순수를 느꼈습니다. '어쩜 저렇게 깨끗하게 음악만이 전달될 수 있을까?' 하고요. 그날 정말 장소나 시간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때의 음악을 다시 들을 순 없었지만, 참 그게 살아있는 연주였죠."

이번 앨범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소나타 외 다양한 소품들이 수록됐다는 것입니다. 모차르트의 생애는 백건우 음악 경력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35년으로 짧았지만, 그의 음악 세계는 어떤 작곡가보다도 폭 넓습니다. 백건우의 음반에는 모차르트에 대한 경외도 담겼습니다. "소나타로만 음반을 구성하는 건 모차르트를 그리기 부족하다"라는 것이 백건우의 생각입니다.

그는 라 단조 환상곡(Fantasia in D minor, K. 397)으로 앨범의 포문을 엽니다. "짧은 몇 분 안에 정말 많은 것들을 그리는 곡이라 인트로로 아주 적합했죠. 항상 비극이 깔린 모차르트의 음악을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첫 곡으로 선정하게 됐어요." 마지막 곡인 푸가(Prelude & Fugue in C major, K.394)를 두고 백건우는 '굉장한 난곡', '모차르트 답지 않은' 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모차르트에게 이런 소리가 있었나, 하며 나부터도 놀랐어요. 우리가 피아노 곡에서 상상을 할 수 없는 대담함이 깃든 곡입니다."

언급했듯 그는 '모차르트 프로젝트 3부작'의 첫 삽을 막 떴습니다. 앞으로 두 장의 모차르트 앨범이 더 남아 있다는 거죠. 이는 모차르트의 음악 세계가 워낙 방대한 탓도 있지만 백건우의 욕심도 있었습니다. "마감 생각 안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곡을 최대한 골랐어요. 그리고 녹음을 시작했더니 (앨범이) 석 장이 돼 버렸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전체적인 곡의 흐름과 조성의 순서를 더 생각했어요."

그에게 늘상 따라 붙는 '건반 위의 구도자'라는 수식보다 '건반 위의 여행자'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작업 방식이었습니다. '정답'과 '결론'에 거부감을 느끼는 백건우는 과거 음반 녹음도 부정적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고 해요. 모든 문화는 항상 변화하는 상태인데, 그것들을 녹음해서 고정시켜두는 것이 싫었다는 거죠. 하지만 이제는 그 마음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좀 넓게 생각해보니, 하나의 음반에는 그걸 녹음했을 때 나의 모습이 담겨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 내가 10년 후 모차르트를 다시 녹음한다면 또 달라지겠죠. 그래서 음반이 '결론'은 아닌 것 같아요. 또 녹음이 그렇게 쉬운 건 아니더라고요. (웃음)"

'결론', 즉 '끝맺음'이 없기 때문에 백건우의 음악과 인생은 늘 열려 있습니다. 여행을 해도 사전에 계획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는 그저 가다 보면 뭔가 새로운 게 보이고, 또 느껴지고, 때가 되면 곡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무엇을 할 지 계획은 없습니다. "(계획을) 말하면 서프라이즈가 아니지.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나부터."

고작 새끼 손가락 두 마디 높이의 건반에서 원하는 소리를 찾아내야 하는 피아니스트의 숙명 속에서도 괴로움은 있었습니다. 이번 앨범은 일생의 사랑 故 윤정희가 오랫동안 알츠하이머와 싸우다 세상을 떠난 후 나온 첫 앨범입니다. 하지만 그 아픔 속에서도 음악을 마주할 때는 거기에 온전히, 또 여전히 집중합니다. "다 잊어버리고 음악과 나만 생각하면서, 음악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해요. 그게 옳은 태도인 것 같습니다."

'모르는 세계는 삶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피아니스트가 '아는 세계'로 돌아가 만난 새로움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신보와 리사이틀에서 확인할 수 있을 듯합니다. 공연은 18일 부천아트센터를 시작으로 6월 21일까지 전국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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