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환 부친 두고, 전남편 찾으러 간다… 지난한 양육비 소송

이강민,최다희 2024. 5. 18.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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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비 못 받아 힘겨운 삶 르포
구승희(가명)씨가 지난 7일 인천의 한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에서 전남편의 차량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차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다. 아래 사진은 구씨가 같은 오피스텔 우편함을 살피는 모습. 최다희 인턴기자


“그래서 아빠 차는 봤어?”

지난 3월 9일. 대학 입학을 계기로 14년 만에 아빠를 만나고 온 딸 민아(18)에게 엄마 구승희(가명·44)씨가 물었다. 딸은 “잘 못 봤다”고 했다. 승희씨는 자기도 모르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풀었다. 법원의 양육비 감치명령을 받아내려면 전남편의 차량 정보가 필요했다. 전남편이 주소지에 실제 살고 있다는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빠를 오랜만에 봐서 좋았다”는 딸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하는 현실이 싫었다.

지난 7일은 식도암 소견을 받은 친정아버지의 병원 진료가 잡힌 날이지만 승희씨는 마음이 급했다. 감치신청 보정 서류 제출일이 얼마 남지 않아 더 미룰 수 없었다. 겨우 발걸음을 떼 전남편이 재혼한 여성과 살고 있다는 인천으로 향했다. 빗속을 뚫고 전남편이 사는 오피스텔에 도착한 승희씨는 지하에 주차된 차량들을 차례로 살피기 시작했다. 플레시를 켜고 차량 30여대를 일일이 확인했다. 주차장에 사람이 나타날 때면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90분 넘게 뒤졌지만 결국 차량을 못 찾았다.

승희씨는 어쩔 수 없이 전남편과 다시 대면해야 했다. “여기에 살면서 왜 서류를 안 받느냐”는 질문에 전 남편은 “안 받은 게 아니라 못 받은 것”이라고 둘러댔다. ‘나쁜 놈’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애써 눌렀다. “민아 생일이었는데 문자 한 번 안 보내더라….” 전 남편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만 툭툭 쳤다. “진짜 급한 일이 있어 가볼게. 나중에 연락할게.” 혼자 남은 승희씨는 한참을 울었다. 그가 4년 전 양육비 소송을 낸 후 전 남편을 마주한 건 이때가 두 번째다.

전남편은 2010년 이혼 후 양육비를 한 차례도 주지 않았고, 법원의 이행명령(7060만원)도 무시했다. 결국 승희씨는 지난해 12월 감치신청을 했다. 이행명령을 세 번 이상 불복하면 30일 범위의 감치(법정의 존엄과 질서를 어지럽힌 사람을 유치장이나 교도소에 가두는 일)에 처해질 수 있다. 그러나 전남편이 사는 주소지로 서류를 보내도 ‘폐문부재’ 등의 이유로 계속 반려됐다. 올해 딸의 대학 입학 후 전남편은 등록금과 용돈 조로 450만원을 보냈지만 이행명령 금액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사설탐정을 고용해 전남편이 사는 오피스텔 쓰레기장을 뒤져 전남편 이름이 적힌 골프채 택배 상자를 발견했다. 승희씨는 “그걸 보니 양육비보다 취미생활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지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주변 시장 4곳을 전부 뒤져 재혼한 아내 명의로 된 채소가게도 찾아냈다. 지난 1월 7일, 이혼한 지 14년 만에 처음으로 전남편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왜 서류를 안 받느냐”는 질문에 전남편은 “(서류를) 받으면 갇히는데 내가 그걸 왜 받느냐”고 대꾸했다고 한다.

2021년 7월 법 개정으로 양육비 미지급 부모에 대한 형사고소가 가능해졌지만 실제 형사고소로 이어지는 과정은 지난하다. 감치명령을 받은 후 1년이 지나야 고소가 가능한데 거주지 확인이 되지 않거나, 전 배우자가 의도적으로 서류를 받지 않으면 감치명령을 받기 어렵다. 이 때문에 양육자들은 공시송달로라도 감치명령을 받기 위해 직접 발로 뛰면서 고의로 서류 수령을 피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증거를 모은다. 공시송달은 당사자 주거불명 등의 사유로 소송 서류를 전달하기 어려운 때 그 서류를 법원 게시판이나 신문에 일정 기간 게시해 송달한 것과 같은 효력을 발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승희씨는 “벌써 다섯 번째 보정서류 제출이다”고 했다.

9년째 양육비 소송 중인 이윤지(43)씨는 상황이 더 안 좋다. 주민등록초본을 떼니 전남편은 ‘거주지 말소’ 상태였다. 이씨는 “법률구조공단, 법무사 모두 상담했지만 감치신청조차 안된다고 했다”고 떠올렸다. 광주에서 33개월 아이를 키우는 김진영(43)씨도 마찬가지다. 진영씨는 “전남편이 번호를 차단해 아예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힘겹게 공시송달로 감치명령이 나와도 실제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는 잘 없다. 10년째 양육비 소송 중인 김은영(40)씨는 지난해 5월 전남편을 고소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불송치됐다. ‘감치결정등본이 피의자에게 공시송달된 것으로 보아 전남편이 감치명령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은영씨는 “형사고소가 가능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지만 허울뿐이었다”고 허탈해했다.


양육비이행관리원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관리원에 접수된 사건 중 감치명령 인용률은 59%다. 낮은 집행률도 문제다. 더불어민주당 강득구 의원실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감치명령 집행률은 8.7%에 그쳤다. 이영 양육비해결총연합회 대표는 “까다로운 감치명령 때문에 소송이 장기전이 돼 양육자들이 지쳐간다”며 “감치명령 집행률도 낮아 실효성에 의문이 든다”고 했다.


감치명령 절차를 생략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른 건 이 때문이다. 이승기 리엘파트너스 변호사는 “감치명령 없이 형사고소를 바로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양육비를 돌려받는 데 훨씬 효과적”이라며 “감치까지는 민사소송이기 때문에 양육자가 직접 뛰어야 하는데, 형사로 넘어가면 공권력으로 직접 나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형사처벌 요건을 ‘감치명령’에서 ‘이행명령’으로 간소화하는 양육비이행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지만 21대 국회 종료가 임박한 상황이라 해당 법안은 결국 폐기될 가능성이 크다.

인천=이강민 기자, 최다희 인턴기자 rive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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