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대통령, 국민들과 소통하는 노력은 많을수록 좋아”

전석운 2024. 5. 17.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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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질문] 송상현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국제형사재판소 소장)
송상현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가 지난 13일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사무실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그는 재임 중 ICC 비준국 수를 획기적으로 늘리는 등 ICC의 위상 정립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학 은사이기도 한 송 교수는 윤 대통령에게 국민과의 소통을 늘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권현구 기자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지난해 3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최근에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대한 체포영장도 검토하고 있다. 미국이 반대하고 있어 실제 영장이 발부될지는 미지수다. 영장이 발부되더라도 회원국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이를 집행할 수단이 ICC에는 없다. 그러나 ICC의 체포영장은 국제사회가 피의자를 전범으로 규정하는 효과가 있다는 게 송상현 서울대 명예교수의 진단이다. 송 교수는 초대 재판관에 선출된 뒤 임기 3년의 ICC 소장을 두 차례 역임했다. 독립운동가 송진우 선생의 손자인 그는 윤석열 대통령의 대학시절 은사이기도 하다.

-네타냐후 체포영장은 어떤 의미가 있나.

“ICC의 체포영장은 시효가 없다. 영장이 발부된 사람에게는 평생 그 혐의가 따라다닌다. 네타냐후는 전쟁범죄 요건을 충족하기 때문에 영장이 발부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국제정치 역학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실제 영장을 발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푸틴 체포영장은 어떤 영향을 미쳤나.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국가 최고 통치권자에게 영장이 발부되면 그 사람의 활동 범위가 대단히 좁아진다. 푸틴은 지난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 정상회담 참가를 취소했다. 푸틴이 남아공 땅을 밟으면 ICC 회원국인 남아공 정부는 그를 체포할 의무가 있다. 푸틴이 실제 체포될 가능성과는 별개로 망신살 뻗치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 인권 문제를 ICC에 회부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가.

“우크라이나, 가자지구와 달리 북한은 현장 조사가 불가능하다. 직접적인 증거 수집을 하려면 ICC 직원들이 북한에 들어가야 하는데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겠나. 아무튼 북한을 ICC에 회부할 법률적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지난 8일 어버이날에 독립운동가 송진우(1890~1945) 선생의 추모식이 현충원에서 열렸다. 할아버지 송진우는 어떤 분으로 기억하는지.

“세 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엄하게 배웠다. 사서삼경을 다 읽고 한문 공부를 참 많이 했다. 어려서 앙탈도 부리고 울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할아버지에게 참 감사하다. 나는 늘 할아버지 방에서 잤다. 손님들과 나누는 대화도 엿들을 기회가 많았다. 할아버지가 자객의 흉탄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공교롭게도 손님이 할아버지 방에서 함께 주무시는 바람에 나는 화를 면했다. 할아버지는 즉사하셨고, 손님은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고 몇 년을 고생하다가 돌아가셨다. 생전 할아버지는 참 대범한 분이었다. 고하(송진우의 호) 선생만큼 통이 크고 포용력이 있는 지도자는 만나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홍역 마마로 얼굴이 팍팍 얽은 여자라도 유심히 들여다보면 예쁜 구석이 있는 법이다. 그러니 사람을 절대로 차별하지 말고 포용해라’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독립운동가 자손의 삶이란.

“어려서부터 늘 감시를 받고 살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순사가 따라다녔고, 해방 이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한국 정부의 감시를 받았다. 내가 고등학생 때도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어머니는 늘 ‘어디 가든 말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평생 트라우마였다. 역대 정부로부터 국무총리와 대법관 등 공직 제안을 많이 받았지만 내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할아버지의 비극적인 최후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치가 양극화나 계층갈등의 결과물로서 극단화된 것인가, 아니면 정치가 사회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것인가.

“정치가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잘사는 나라로 꼽힌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인터넷이 되는 나라가 한국 말고는 없다. 기업인들도 국제무대에서 잘하고 있고, 의료복지나 행정서비스, 공무원의 질도 높다. 그런데 유독 정치는 낙후돼 있다.”

-왜 그럴까.

“너무 당파적 관점으로만 정치를 보면서 정의와 상식에 맞는 사고나 언행을 하지 않는 게 문제다. 선진국 중에도 정치가 후퇴하고 극단화하는 나라가 나타나고 있다. 이런 풍조가 전 세계를 휘몰아치고 있는 것 같다. 세월이 가면서 손해 볼 만큼 손해 보고 무너질 만큼 무너지고 나면 새로운 싹이 틀 것이라고 생각한다.”

-2020년에 쓴 ‘송상현 회고록’에서 윤석열 대통령(당시 대구지검 검사)을 ‘애제자’라고 표현했다. 윤 대통령에게 학창시절 남다른 면모가 있었나.

“책을 많이 읽는 학생이었다. 내가 제자들에게 잔소리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젊은 나이에 일찍 고시에 합격하면 뭘 하나. 인문소양이 부족하면 무식하다는 소리 듣는다. 제발 책을 많이 읽어라’ 많은 학생들이 귓전으로 듣는데, 윤 대통령은 그렇지 않았다. 책을 많이 읽기 위해 속독법까지 익혔다고 하더라. 한번은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 ‘Free to Choose’를 들고 내 방에 와서는 ‘교수님, 이 책 읽어보셨어요?’라며 대화를 나눈 기억이 있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도 원서로 읽었다며 리뷰를 하더라. 대통령이 된 뒤에도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공직사회에서는 ‘윤 대통령이 회의 석상에서 말씀이 너무 많다’고 불만이던데, 윤 대통령의 다변은 독서량에서 오는 자신감의 영향일까.

“그이는 학생 때도 그랬어(웃음). 같이 고시 공부하던 애들을 끌고 나가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면 늘 좌중을 휘어잡았어. 자기가 읽은 인문사회학 책에 대해 입담을 풀면 다른 사람은 당해내지를 못했어.”

-임기 2년을 막 지난 윤 대통령의 국정지지도가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 중 꼴찌다.

“윤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가 어려워진 건 맞는다. 남은 임기 3년간 고생할 것이다. 대통령 주변에 정치력이 있는 사람도, 대통령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도 별로 안 보이기 때문이다. 용산이든 국민의힘이든 다들 대통령만 쳐다보고 가만히 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게 대통령 본인 책임이다. 늘 스스로 반성하고 소통에 힘쓰며 겸손해야 한다. 정치라는 게 상대방이 있어서 불가피한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야당에서도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탄핵한다는 얘기는 함부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윤 대통령에게 조언을 한다면.

“힘들지만 잘 해낼 거다. 취임 2주년 기자회견 같은 건 좋았다. 자주 회견을 하면 대통령의 생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늘어날 거다. 회견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많이 들겠지만 국민들에게 대통령의 생각을 자주 전하는 게 도리다. 대통령이 섬기는 국민들과 소통하는 노력은 많을수록 좋다.”

■ 송상현은 누구

사진=권현구 기자

송상현(83)은 서울대 법대 재학 중 고등고시 행정과와 사법과에 합격했다. 미국 코넬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31살 때부터 서울대 교수를 지냈다. IMF 구제금융 시절인 1998년 뉴욕에서 한국 정부의 구조조정 노력을 유창한 영어로 설명하며 국제채권단을 설득시켰다. 이 모습을 지켜본 박수길 당시 유엔 대사가 국제형사재판소(ICC) 초대 재판관 선거에 나설 한국 대표로 송 교수를 추천했다.

서울대는 송 교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9년 교내 모의법정을 ‘송상현홀’로 명명했다. 2022년에는 송상현국제정의평화인권재단(이사장 김용덕)이 설립됐다. 송 교수는 자신의 ICC 소장 선출에 대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마지막 소명이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2015년 ICC 소장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뒤에도 ICC 재판관 후보들을 면접하는 등 ICC 내 영향력이 상당하다.

송 교수는 자신보다 조부인 송진우 선생의 삶이 조명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13일 송 교수가 명예회장을 맡고 있는 유니세프한국위원회를 찾아갔을 때도 송 교수는 최근 출간된 송진우 전기와 관련 서적들을 건네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송진우는 중앙학교장 시절인 1919년 3·1 만세운동을 기획했고, 동아일보 사장을 지내면서 농촌계몽운동(브나로드운동)을 이끌었다. 광복 직후 한민당 당수를 맡았으나 1945년 12월 30일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암살됐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그의 동상은 1983년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에 세워졌다. 2017년 서울시 종로구와 전남 담양군은 각각 선생의 집터와 생가 인근 도로를 ‘고하 송진우길’로 명명했다.

전석운 논설위원 swch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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