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하의 시시각각] 박근혜 가슴에 한 남긴 국회의장

김정하 2024. 5. 1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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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하 논설위원

공식 의전 서열은 낮아도 실제로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를 실세(實勢)라고 부른다. 대통령실 민정수석이 그런 대표적 케이스다. 그렇다면 허세(虛勢)는 의전 서열은 높지만 실제 권력은 별 볼일 없는 자리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가장 허세 이미지가 강한 자리를 꼽는다면 아마 국회의장이 아닐까 싶다.

입법부의 수장인 국회의장의 의전 서열은 대통령 다음 가는 2위지만, 국회의장이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국회의 운영은 사실상 여야 원내대표가 결정하는 것이며, 외견상 의장의 역할은 합의된 의사일정에 따라 본회의를 열어 안건을 처리하는 정도다. 장관급인 국회 사무총장 임명도 의장 마음대로 하긴 어렵고, 대개 ‘실세’들과 협의를 거쳐야 한다.

「 대통령과 정면 충돌했던 정의화
의장이 당파의 대리인 되면 곤란
우원식 당선은 최소한의 자정작용

그러나 국회의장이 만만히 보여도 진짜 허세인 것은 아니다. 국회의장은 절대적인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도 의장이 본회의 처리를 거부하면 의장 임기(2년) 내엔 절대로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다. 반대로 상임위에서 막혀 있는 법안을 국회의장이 바로 본회의로 끌어올려 처리할 수 있는 권한(직권상정)도 있다. 평시엔 국회의장의 존재감이 미미해 보이지만, 비상한 상황에선 의장의 판단이 정국의 향배를 판가름할 결정적 변수가 된다.

2015년 12월 16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요구한 경제활성화법 직권상정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2년 국회법엔 국회의장이 당적을 가질 수 없다는 조항이 신설됐다. 의장이 소속 정당의 눈치를 보지 않고 초당파적으로 소신 있게 국회를 운영하라는 취지다. 그 이후 역대 국회의장들은 자기 친정과 크고 작은 불화를 빚었는데, 그중 충돌이 가장 심했던 이는 정의화 전 의장(재임 2014~2016년)이 아닐까 싶다. 그는 2015년 말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경제활성화법을 직권상정으로 처리해 달라고 줄기차게 압력을 넣었지만 끝까지 못한다고 버텼다. 국회법상 의장이 직권상정하려면 ‘전시와 사변,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여야 하는데, 당시 상황을 그렇게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올 초 펴낸 회고록에서 정 전 의장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19대 국회는 여대야소였지만 국회선진화법이란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혀 의미 있는 법안 처리는 거의 하나도 해내지 못했다. 국회선진화법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던 정의화 국회의장은 어느 당 출신인지 모를 정도로 청와대와 거리를 뒀다. 2015년 말 내가 경제활성화법을 좀 처리해 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도 정 의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정 의장이 끝내 직권상정을 거부해 19대 국회에서 경제활성화법 처리가 무산된 건 지금도 내 마음에 한으로 남아 있다. 나중에 문재인 정부에서 민생 법안도 아니고 정략적 법안들을 안면 몰수한 채 직권상정으로 처리하는 것을 보고 문 대통령은 국회의장 걱정은 안 해도 되니 속이 편하겠다 싶었다.”

경제활성화법 처리 무산이 경제에 미친 영향에 대한 평가는 별도겠지만, 어쨌든 정 전 의장이 초당파적으로 국회를 운영하려고 애쓴 것만은 틀림없다. 현 김진표 의장만 해도 가끔 ‘개딸’들로부터 험한 욕을 먹어가면서 국민의힘을 배려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국회의장의 전통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16일 더불어민주당에서 국회의장,부의장 후보로 선출된 우원식(왼쪽), 이학영 의원이 의원회관에서 꽃다발을 들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16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장 후보 경선에서 대이변이 벌어졌다. 친명계의 교통정리에 힘입어 무난히 당선될 것이라던 추미애 당선인이 떨어지고 우원식 의원이 승리했다. 최근 친명계가 이재명 대표의 측근인 박찬대 의원을 원내대표로 추대한 데 이어, 국회의장까지 ‘명심’을 내세워 추 당선인으로 몰고 가자 반발이 심했던 모양이다.

특히 추 당선인이 노골적으로 ‘당파적 국회의장’을 예고해 파문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번 경선 결과는 입법부의 권위를 지키려는 최소한의 자정 작용이었다고 믿고 싶다. 우 의원은 민주화 운동의 주요 계보를 잇는 인사다. 당파의 대리인이 아니라 입법부 수장의 본분을 수행해 의회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김정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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