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한 풍경 속 섬세한 관계를 만드는 일

윤정훈 2024. 5. 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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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형태에서 풍부한 감각을 이끌어내는 '르씨지엠' 구만재의 디자인 철학.

건축, 인테리어, 가구와 조명,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아우르며 20년 넘게 다양한 공간을 다뤄왔습니다. 집과 각종 상업공간과 클리닉, 심지어 남극 기지까지 범주가 다채로워요

공간과 관련해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저희 사무소의 특징입니다. 규모와 유형을 떠나 공간을 다루는 일 자체를 즐기기도 하지만, 구분하는 게 오히려 어색해 보입니다.

양평에 있는 단독주택 ‘메종 404 B’

남극에는 어떤 공간을 계획하고 있나요

6년여 전부터 남극세종과학기지와 장보고과학기지를 리뉴얼하는 프로젝트의 기본 설계를 맡았는데, 공공 프로젝트라 오랜 기간 작업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남극의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는 겁니다. 폭설이나 강풍 등 기상에 좌우되지 않는 공간이어야 하고, 발전소는 반드시 두 개 이상이어야 하죠. 여름에도 영하 20℃, 겨울엔 영하 50℃에 이르는 상황에서 난방에 문제가 생긴다면 연구원들의 생명과도 직결되니까요.

백색 사비석을 사용한 메종 404 B 외관. 단일 재료를 쌓는 방향과 방식을 달리해 벽과 바닥을 통일하는 동시에 구분했다.

주거공간에 애정을 갖고 다수의 단독주택을 지어왔어요. 집을 다룰 때 무엇을 중요하게 고려하나요

실내건축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에 내부자 관점에서 공간을 바라보게 됩니다. 조형성으로 임팩트를 주기보다 보편적 형태에서 감각을 풍부하게 만드는 설계를 지향해요. 그것이 삶의 평온으로 이어진다고 믿죠. 가령 처마는 가능하면 꼭 만들려고 합니다. 창문과 외벽이 딱 맞아떨어지면 외관상으로는 모던해 보이지만 사용자 입장에서는 불편하거든요. 비가 오면 창문도 못 열고 유리창에 빗물이 그대로 닿으니 금방 지저분해져요. 처마에 고인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선사하는 감각도 놓치게 되고요. 만약 클라이언트가 지붕을 싫어하면 벽의 두께를 늘려 창을 깊게 만드는 식으로 보완합니다.

밤의 언어를 모티프로 디자인한 ‘바 포스트스크립트’. 모호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풍긴다.

재료나 가구를 고르는 기준은

인위적 느낌이 강한 산업 소재보다 벽돌 등 자연에서 온 것을 선호합니다만, 주된 기준은 사용자가 느낄 촉감에 있습니다. 바닥재라면 어딘가 보들보들해서 맨발로 걸었을 때 기분이 좋은 것, 욕실이라면 살짝 까슬까슬한 게 좋겠죠. 일상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사소한 감각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가구나 조명을 선택할 때도 사물이 지닌 목소리에 집중합니다. 지나치게 튀지 않고 공간 속에서 잘 어우러지도록 균형을 잡는 거죠.

헤르만 헤세의 시구 “안개 속에서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은 신기한 일”이라는 말을 인용해 스튜디오의 디자인 철학을 ‘안개를 만드는 일’이라고 설명한 적 있어요

‘공간을 흐릿하게 하기’라고도 할 수 있어요. 항상 ‘이 디자인이 5~10년 후에도 유효할까?’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지나친 조형성으로 임팩트를 주기보다 공간을 이루는 요소 하나하나를 자연스럽게 연결해 어딘가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걸 선호합니다.

반대로 디자인 작업에서 경계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이 순간 사람들이 멋있어 하는 것. 디자인 면에서는 트렌드를 믿지 않아요.

수원 광교 앨리웨이에 자리 잡은 그로서런트 키친 ‘아오로(Aoro)’. 천장 구조와 조명, 벽 패턴이 중첩되면서 깊이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성수동 복합문화공간 LCDC 옥상에 있는 와인 바 ‘바 포스트스크립트(Bar Postscript)’를 디자인했죠. 동양과 서양, 차분함과 화려함이 공존하는 분위기가 인상적입니다

LCDC를 기획한 김재원 대표의 제안으로 진행한 프로젝트였어요. 바 포스트스크립트의 클라이언트는 여느 바처럼 벽면을 술병으로 가득 채우길 바랐지만, 제 생각은 반대였어요. 술병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면 했죠. 술 마시고 취하는 공간보다 ‘바’의 본질을 생각했습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저녁과 함께 마시는 술 한잔. 그때부터 오롯한 나만의 시간 또는 친구들과 속내를 드러내는 대화가 시작되잖아요. 영혼의 안식처처럼 한결 차분한 분위기의 공간을 구상했습니다. 기존 엘리베이터 방향을 반대로 돌려 한 차례 돌아가게 한 뒤, 바 출입구 옆에 작은 수조를 만들어 이곳에 들어서는 기대감을 고조시켰어요. 한눈에 읽히는 공간만큼 매력 없는 것도 없으니까요. 시각적으로 거슬리는 냉난방 장치나 소방 시설을 세심히 숨긴 천장은 다소 밋밋해 보일 수 있으나 어두워지면 진가가 드러납니다. 진열장 속에 있는 와인 잔에 반사된 빛이 오묘한 그림자를 더해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죠. 바닥엔 일일이 손으로 깨뜨려 형태가 불규칙한 벽돌을 깔아 실내외의 구분을 모호하게 했습니다. 제가 디자인한 공간은 한 편의 시처럼 유연하고 모호하게 다가가길 바랐어요. 이용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도록요.

풍경을 향해 안팎으로 열린 양평 단독주택 ‘메종 103’.
흰 벽과 간살문의 대비가 인상적인 평창동 단독주택 ‘메종 494’.

얼마 전 춘천 제이드가든 내 브런치 카페를 리모델링하기도 했어요

식물원 옆 낡은 공간을 다루는 프로젝트였습니다. 브랜딩은 아라비 스튜디오 이혜원 대표가 맡았고요. 주변에 잘 조성된 정원이 있으니 역설적이게도 ‘바깥을 이기는 공간을 만들지 않는 것’이 목표였어요. 전체적으로 베이지와 그레이의 중간 톤을 입혀 풍경과 사계절을 잘 받아들이는 공간으로 디자인했습니다.

베이지 톤으로 마감해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제이드가든 브런치 카페 원형 계단.
박공지붕 아래 처마로 깊이감을 만들어낸 ‘메종 12’의 밤 풍경.
공개를 앞둔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국내 모 기업과 함께 제주도에 대규모 아트 타운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개별 스테이 동만 수십 채에 이를 예정인데, 여러 건축가에게 각기 다른 ‘맛의 공간’을 맡기려고요. 그중엔 ‘슴슴’하고 ‘칼칼’한 공간도 있어요( 웃음). 긴 여정이 되겠지만 그만큼 기대되는 일이라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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