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이 주인공, 3년 따라다녔다"

클레어함 2024. 5. 16.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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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화 < Bigger Than Trauma > 베드라나 프리바치치 감독

[클레어함 기자]

1992년에서 1995년까지 지속된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은 현지인들에게 큰 마음의 생채기를 남겼다. 특히 접경지역 크로아티아 동부의 도시 부코바르 (vukovar)는 1991년 87일간 세르비아군의 공격을 받아 2천 명이 학살되는 피해를 겪었다. 하지만 동시에 '대 크로아티아'의 야망을 품었던 국수적 성향의 크로아티아 초대 대통령 투지만 프라뇨는 영토 팽창을 위해 보스니아와 무력분쟁을 일으켰다.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ICTY)는 크로아티아 고위 관료 6명에게 전쟁 범죄 유죄를 선고하고 투지만 정부가 인종 청소라는 범죄 정책을 추구했다고 결론지었다. 1993년 크로아티아 군인들에 의해 약 120명의 보스니아인들이 살해된 아흐미치 대학살이 그 대표적인 예다. 즉 크로아티아 정부는 피해자성과 가해자성을 동시에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1990년대 유고전쟁에서 살해된 10만 명 중 80%는 보스니아계로 알려져 있다. 발칸반도는 여전히 상충되는 역사적 서사가 혼재하고 극우정치인들은 이를 악용하고 있어 이웃국가간 진정한 화해는 아직 어려운 과제로 남아있다. 

하지만 발칸반도 통합을 위해 가장 앞장 서는 것은 단연코 여성인권 운동가들이다. 2015년 세르비아의 여성단체 '우먼 인 블랙'을 비롯,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코소보, 북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의 여성단체들은 1년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여성모의법정을 열며 평화와 화해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여성법정 https://zenskisud.org/en/filmovi.html).

특히 이들은 전시 성폭력의 피해 여성과 남성을 지원하기 위해 수십년간 함께 연대해오고 있다. 이들의 오랜 투쟁은 결국 결실을 맺어 2015년 크로아티아 정부는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특별법을 제정해 매달 약 300유로의 지원금을 제공하고 있다. 피해자 예상수치의 약 10%-15%가 정부에 신고한 상태인데 이들 중 25%는 남성 피해자였다. 유엔 2013년 통계에 의하면, 크로아티아의 전시 강간 피해자는 약 1500명에서 2200명으로 추정된다.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조명하다
 
 영화 포스터. 이 영화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중 성폭력에서 살아남은 세 명의 여성을 3년 동안 조명한다. 이들의 트라우마가 치유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 감독 제공
 
여성의 법정에 크로아티아 회원단체로 참가했던 '로자 전쟁여성피해자 센터' (Rosa Centre for Women Victims of War)의 넬라 파무코비치 활동가는 지난 15일 필자와의 줌인터뷰에서 "마침내 크로아티아 사회는 수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전쟁 중 강간 피해자들이 겪은 트라우마를 인정했다"며 "이 특별법이 개선의 여지가 많지만 큰 이정표"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아울러 "전시 성폭력은 30년 전에 일어났지만 피해자들은 여전히 존재하며, 그들 중 상당수는 자신이 겪은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며 아직도 쉽지 않은 과제임을 시사했다.  

이런 전후 생존자 치유 노력은 비단 정부와 엔지오 차원에서만 진행되온 것은 아니다. 문화예술분야, 특히 영화부문에서도 크로아티아 영화인들의 노력이 돋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의 치유과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다큐영화 < Bigger Than Trauma (트라우마보다 더 큰) >다.

이 영화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중 성폭력에서 살아남은 세 명의 여성을 3년 동안 따라가며 이들의 트라우마 치유과정을 보여준다. 마리야는 자신이 자유로워질 자격이 없다고 느끼고 카티카는 변화를 매우 두려워한다. 그룹에서 유일한 세르비아인인 아나는 자신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외로운 오리 새끼라고 묘사한다. 하지만 이 생존자들은 트라우마를 극복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서서히 가능성을 깨닫고 그들의 삶과 인간관계가 극적으로 변화한다. 

이 다큐를 연출한 베드라나 프리바치치 감독은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Nova TV, RTL, CNN등 크로아티아 및 국제 매체에서 TV 리포터로 활약했다. 그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 < Bigger Than Trauma (트라우마보다 더 큰) >는 자그레브 독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언급과 관객상을 수상했고, 보스니아 사라예보 영화제에서는 인권 부문 '하트 오브 사라예보상'을 수상했다. 크로아티아에서 역사가 가장 깊은 영화제인 풀라영화제에서는 최우수 작품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는데 이는 영화제 70년 역사상 다큐멘터리 영화로서는 처음이었다. 

베드라나 프리바치치 감독은 국내외에서 22개 영화상을 수상한 이래, 지난 2년간 전쟁 범죄를 다루고 생존자를 지원하는 많은 단체, 정신 건강 주제의 행사 등에서 연사로도 열정적으로 활동해오고 있다. 지난 달 독일 비스바덴에서 열렸던 고이스트(GoEast)영화제에서도 전시 성폭력과 영화적 표현을 주제로 한 토론회에 프로듀서 미르타 푸흘로브스키 (Mirta Puhlovski)와 함께 참석해 강간 생존자들의 트라우마 치유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필자는 지난 두 주간에 걸쳐 감독과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아래는 일문일답.
 
 프리바치치 감독과 푸흘로브스키 피디가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에서 열린 자그레브 독스 영화제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Samir Ceric Kovacevic
 
-영화는 '나는 내 트라우마 그 이상이다'라는 치유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일상과 치유과정을 보여준다. 어떤 계기로 이 프로그램을 다큐로 제작하게 됐나. 
"모든 것은 보스니아에 산 적이 있던 제 이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아주 가난해서 빈 병을 수집하곤 했고 저도 종종 그녀에게 병을 가져다 주곤 했다. 한 번은 제 직업이 뭐냐고 물어보길래 영화감독이라고 말했더니 제 주인공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한 수용소에 갇혀 1년 동안 수차례 강간을 당했다. 그 수용소를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20년 넘게 자녀들과 연락이 끊겼고, 제가 그들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길 원했다. 저는 그녀가 트라우마 치료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강간당한 여성들을 지원하는 단체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러던차에 마침 제 프로듀서가 'Women in War'라는 엔지오의 이 프로그램에 대해 알고 있었다. 저는 제 이웃을 그곳에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프로그램이 훌륭하다고 느꼈고 영화로 만들게 됐다."
-본인의 영화 연출 방식은 일반적으로 인터뷰만 많은 전형적 다큐 스타일과는 매우 다르다. 주인공들의 사적인 삶과 감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우리는 이 영화를 증언이나 아카이브 자료로만 구성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의 첫 출발점이었다. 물론 이런 종류의 영화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접근 방식에서 아쉬운 점은 희망이다. 이런 영화를 보면 감정적으로 압도당해 염세적인 느낌으로 영화관을 나오게 된다. 제 할머니는 세 번의 전쟁을 겪었고, 제 모친은 두 번의 전쟁을 겪었으며, 저는 이미 한 번의 전쟁을 경험했는데, 이런 전쟁 경험은 세대를 거쳐 트라우마로 전해진다. 우리는 어둠이 지나면 빛이 있는지,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이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 후 어떻게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지, 심지어 강간 트라우마 이후에도 성장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끔찍한 시련을 겪은 후, 삶이 줄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에서 분리된 후, 어떻게 다시 자아와 연결될 수 있을까 등에 대해 고민했다. 주인공들이 겪은 모든 일들이 너무 끔찍해서 같은 여성으로서 그들이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제게는 최고의 일이었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독스 영화제 상영회에서 주인공들이 무대인사 중이다. 이 영화제에서 주인공들은 기립 박수를 받았다. 영화 감독은 "다큐의 주인공들은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치유에 대한 희망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영화를 통해 자신들이 삶을 더 좋게 변화시켰다는 걸 시각적으로 기억하기 위해서 이 영화가 상영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 Martina Cvek
 
- 관객들, 특히 주인공들의 반응은 어땠나.
"전반적으로 아주 좋았다. 주인공들은 자그레브 독스 영화제 시사회에서 기립 박수를 받았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카티카는 이 영화를 통해 남자친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녀는 전에는 남자친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또 다른 주인공 마리야는 시사회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밤잠을 제대로 잔다고 했다. 관객들은 저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영화와 주인공들에 대한 따뜻한 환영, 상영 후 나누는 눈물과 악수, 제가 들었던 모든 개인적인 이야기는 여전히 인간과 휴머니티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한다."

"영상미 잃었지만 생생한 현실 보여줄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성폭력 생존자들의 매우 내밀하고 개인적인 삶의 일부를 보여준다. 어떻게 주인공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특별히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접근 방식이 따로 없었다. 우리는 단지 관찰을 위해 여기 있는 것이지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치료 과정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촬영 장비도 가져가지 않았고, 조명도 없었으며, 고정식 카메라와 핸드헬드 카메라 한 대만 가지고 작업했다. 현장에는 항상 저, 촬영감독 다리오 하첵, 프로듀서 미르타, 셋만 있었다. 이런 방식 덕분에 영화는 영상미를 잃었지만, 영화에서 보기 힘든 생생한 현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심지어 주인공들이 이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배급하지 않겠다는 계약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5년간의 강도높은 작업 끝에 그들이 영화에 동의하지 않으면 돈을 쓰레기통에 버리겠다는 거의 미친 제작 결정이었다. 주인공들은 우리가 그들 편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들은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치유에 대한 희망을 주고 싶어서, 그리고 영화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더 좋게 변화시켰다는 걸 시각적으로 기억하기 위해서 이 영화가 상영되기를 원했다."

-촬영에 3년, 편집에 2년,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데 5년이나 걸렸다. 전체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을 하나 꼽는다면.
"배급을 위해 영화를 파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전쟁 전략의 무기로 자주 사용된다고 생각하나? 
"성폭력은 물론 평화와 전시 모두 존재한다. 특히 강간은 여성을 비롯해 남편, 어머니, 자녀, 자매 등 주변 모두를 파괴하고 세대를 뛰어넘는 트라우마를 가져오기 때문에 전쟁 무기로 사용된다고 생각한다."

-현재 전 세계에는 35개의 군사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성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이 많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제는 현지 당국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유럽연합이나 유엔이 이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데 초점을 맞춰 보다 체계적인 지원에 나설 때가 되지 않았을까.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데니스 무퀘게와 나디아 무라드가 2019년에 설립한 '세계 생존자 펀드' (Global Survivors Fund)는 우크라이나 정부를 통해 현재 전쟁에서 강간 피해자를 지원하고 있다고 하는데 아주 좋은 사례로 보인다.
"주요 국제기구의 모든 이니셔티브는 훌륭하다. 제 주인공의 치유 프로그램 첫 자금을 지원한 곳이 바로 유엔이다. 하지만 아직도 이런 이니셔티브는 적다. 또한, 새로운 것을 거의 시도하지 않는 의료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정신 건강은 온갖 종류의 약물을 사용하는 정신과 및 정신치료요법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정신적 치유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에서 신체는 종종 잊혀진다. 트라우마는 사람의 육체에도 남아 있다. 약은 잠시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치유할 수는 없다. 트라우마가 치유되려면 상처를 먼저 열어야 한다. 아울러 이런 치료는 병원 내에서 행해지는데 강간 생존자들에게 병원은 좋은 환경이 아니다. 병원은 아픈 사람들을 위한 곳인데, 강간 생존자에게 '당신은 아프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과 같다. 제 주인공들이 자그레브 중심가에 있는 한 임대 아파트에서 치료를 받은 것은 어쩌면 상식적인 일일 것이다. 자신이 직접 꾸미고 돌보았기 때문에 마치 자신의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함을 느꼈다. 오늘날 정신적 치유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이 많이 있지만 국가 의료 시스템에서 (이것이) 실현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기금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다소 의구심이 들지만 어쨌든 일단 박수를 보낸다."

-여성들의 전시 성폭력의 경험과 고통을 가시화해 준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이 영화와 주인공들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 영화는 전시 트라우마 치유가 실제로 가능한데, 왜 기존 정치권에서는 이 치유 프로그램에 관심이 없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왜 이런 프로그램이 크로아티아는 물론 전 세계 모든 신문에 실리지 않는 것인가. 왜 크로아티아 정부는 향후에도 이 프로그램을 제공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는 지금 이 프로그램을 필요로 하는 수천 명의 여성들이 있다. 현재 수많은 강간이 일어나고 있는 우크라이나에 왜 이 프로그램을 공유하지 않는 걸까? 이 프로그램은 심지어 '자금 부족과 권력자들의 관심 부족'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시 성범죄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 트라우마를 덮으려 하지 말고 직면하는 것, 트라우마가 발생한 직후에 국가 또는 엔지오가 주관하는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후 경제를 재건하고 새로운 거리를 만들고 어린 묘목을 심지만, 인간의 영혼은 전쟁 당시의 모습 그대로 두고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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