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몰살한 원수, 뺨 한대로 용서한 사람 [박만순의 기억전쟁2]

박만순 2024. 5. 16.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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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전쟁] 부역혐의자를 살려준 이인재... 보복의 악순환을 끊다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부역혐의자를 살려준 이인재(좌측)
ⓒ 박만순
 
매서운 바닷바람이 이인재(1922년생)의 뺨을 붉게 했지만 그는 선상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태극 문양을 한 완장을 오른팔에 차고 머리띠를 한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정면만을 응시했다. 무표정한 듯한 그의 얼굴과는 다르게 그의 가슴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군함이 왜 이렇게 천천히 가지?'라는 답답함이 항해 내내 그의 머리를 괴롭혔다.

이인재가 탄 군함에는 해병대 백남표 소령의 일명 '백부대' 1개 중대원(약 100여 명)이 승선해 있었다. 원래 백부대는 1950년 10월 2일 목포에 상륙했는데, 지방 좌익에 의해 학살된 임자도 유족들의 요청으로 10월 19일 새벽 임자도를 향해 출항한 것이다.

사실 임자도에서 학업이나 생계를 위해 목포로 유학을 하거나 분가(分家)를 한 이들은 적지 않았다. 그런데 '빨갱이들이 기독교인, 부자, 우익인사 가족들을 셀 수 없이 학살했다'는 소문이 바람과 해류를 타고 목포에 전해졌다.

특히 임자교회 이판일 장로와 그 가족, 성도들이 몰살했다는 소식에 전남 목포의 기독교계와 지역사회는 발칵 뒤집어졌다. 이인재는 28세라는 젊은 나이였지만 임자교회 이판일 장로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부역자 색출위원장'이라는 감투를 썼다. 전남 무안군(현재의 신안군) 지도에서 아침을 먹은 백부대는 임자도 근처에 와서 함포사격을 퍼부었다. 지방 좌익들의 저항은 없었고, 진리선착장에 상륙한 백부대원들은 삼삼오오로 흩어져 부역자라고 의심되는 이들을 잡아들였다.

가족들의 시신

백부대원들이 부역자들을 붙잡기 위해 눈이 충혈되었다면 이인재는 애초에 그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군함에서 내리자마자 면소재지인 진리 자신의 집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숨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설마 모두 죽기야 했을라고'라는 일말의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님. 어머님. 할머니" 목청껏 불렀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이웃집으로 달려가서 자신의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

여러 집을 거친 후에야 "대기리 모래산(백산)으로 가보게"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래산에 갔을 때는 가족의 시신을 찾으려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시신 썩는 악취로 인해 수건으로 입을 감싼 이들도 있었고, 어떤 이는 냄새에 질식해 기절하기도 했다.

이인재는 이미 파헤쳐진 구덩이 속에서 가족들을 찾느라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옆에서 도와줄 이가 하나도 없었다. 자신은 목공예사업을 하느라 목포에 가 있어서 화를 면했지만, 임자도에 있던 가족들은 몰살됐기에 시신 수습을 도와줄 이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다른 이들의 주검을 헤집는 것은 숨을 쉴 수 없는 고역이었다. 단순히 부패한 시신으로부터 나오는 악취 때문이 아니라 쇠몽둥이에 맞고 죽창에 찔려 머리가 박살나고 이그러진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아니 '지옥이 바로 이곳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몇 시간 만에 살이 부패했지만 옷가지가 아버지 이판일 장로임이 분명한 주검이 나왔다. "아이고. 주여" 주변에 어머니, 할머니, 동생, 작은아버지, 조카들의 시신이 연이어 나왔다.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머리가 하얘졌다. 입에서는 오로지 "주여" 만이 나오고 눈물, 콧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인재가 모래산에서 가족 12명의 시신을 수습했지만 갯벌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조카 이완순(당시 8세)의 시신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아들아, 내가 모두 용서했는데..."
 
 이인재의 의로운 행위를 기리는 '용서하라' 화해탑(사건 현장에 세워짐)
ⓒ 임자진리교회
 
백부대원들이 잡아들인 부역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마을 주민들로부터 제보를 받아 학살에 적극 관련되었다고 의심되는 10명이 마을 광장에 세워졌다.(진실화해위원회,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 탄압과 학살 연구', 2021) 학살에 참여하거나 적극 개입한 이들은 모두 지도를 거쳐 영광 불갑산으로 도주한 상태였다.

잡혀 온 이들과 광장 한가운데 세워진 이들조차 부역자의 가족일 뿐, 학살에 직접 관련된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군인들은 옥석을 가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광장에 운집한 주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위 '빨갱이 가족'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예의주시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인공시절 완장 찬 이들에 의해 가족을 잃은 이들이었다.

"어이, 이 위원장 이리 나오시게" 반말인지 존대어인지 구분되지 않는 말투로 백부대 중대장은 이인재를 불렀다. 앞으로 나선 이인재에게 중대장은 권총을 건넸다. "당신이 처리하시오"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이 몰살당한 이인재에게 원수들을 처형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한 것이다.

붙잡혀 온 이들은 자기들이 온전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백부대 중대장이 막상 이인재에게 권총을 쥐어주자, 부들부들 떨며 오줌을 지렸다.
권총을 받아 쥔 이인재는 눈을 감고 묵상했다.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모래산에서 머리가 박살나고 얼굴이 이그러진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굴이 퉁퉁 부어 형체조차 알 수 없었던 할머니의 얼굴도 떠올랐다. 순간 눈이 꿈틀거리고 권총을 쥐어진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그 순간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아들아. 내가 모두 (원수를) 용서했는데, 왜 네가 그들을 심판하려고 하냐!"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영적 체험을 한 것이다. 사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용서하라는 사랑의 철학, 믿음의 사상은 아버지 이판일 장로만의 것이 아니었다.

임자교회를 설립한 문준경 전도사는 평소에 "예수 믿는 사람은 늘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동시에 예수님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라는 마태복음 5장 44절의 말씀이 떠올랐다.

눈을 뜬 이인재는 앞에 선 이들에게 "당신들을 살려 주겠소.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소. 당신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약속한다면 말이오" 죽음 직전에 있는 이들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모두에게서 "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권총은 다시 중대장에게 돌려졌다. 모든 것을 지켜보던 백부대 중대장도 감히 광장에 세워진 이들에게 총구를 다시 겨눌 수는 없었다. 백부대원들이 떠난 광장에는 보이지 않는 감동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뺨 한 대의 용서

이인재가 부역자 10명을 살려 줬다고 해서 임자도에서 군경의 부역자 색출작업이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대기리에서는 부역혐의로 즉결 처형된 이도 있었고, 섬 곳곳에서 부역자(부역혐의자) 가족들을 향해 방아쇠가 당겨졌다. 1950년 10월 19일부터 한동안 임자도에는 총성이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부역자 검거 작전은 임자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인공시절 여성동맹 활동을 했던 한 여성에 대한 추적작업이 시작됐고 전남 영광군에 숨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임자지서는 '부역자 색출위원장' 이인재를 앞세워 경찰들을 영광에 급파했다.

용의자가 숨어 있는 초가를 경찰들이 에워쌌다. 방문을 여는 역할은 이인재가 맡았다. 그가 문고리를 확 잡아당기자 방안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이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문고리를 잡아당긴 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뒤이어 경찰들이 구두를 신은 채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한동안 여성을 노려보던 이인재는 여성의 뺨을 한 대 갈겼다. "최소한 한 사람은 살려 뒀어야 할 거 아녀" 그가 한 말은 그게 전부였다.

어떤 욕설도 없었고, 원망의 소리도 없었다. 가족 13명의 죽음에 그 여성이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 하더라도 6.25 전부터 좌익활동을 하고 인공 때 여성동맹 활동을 했던 가족의 원수(?)를 앞에 두고 이인재가 한 것은 뺨따귀 한 대가 전부였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한 이인재는 부역자(부역혐의자) 구명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을 이장에 자원한 그는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광목을 찢어 태극 문양의 완장을 만들었다.

이 완장을 찬 이들은 반공주의자(?) 이인재가 보증하는 사상이 건전한 이라는 것이다. 이인재와 임자지서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소식이 섬에 퍼지자 이인재 집에는 완장을 얻기 위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 사람의 선한 행동
 
 임자교회(현 임자진리교회) 교인 48명의 순교를 기리는 기념비에 서 있는 이판일 장로의 손자 이성균 목사.
ⓒ 임자진리교회
 
후일 목사가 된 이인재의 '원수를 사랑한' 행위를 "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당시의 분위기에서 자신의 가족을 죽인 빨갱이들을 살려 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한국전쟁 초기에 예비검속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살려 준 경찰서장과 지서장, 우익단체 간부는 적지 않게 있다. 대표적으로는 문형순 제주 성산포경찰서장, 이섭진 영동 용화지서장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미담은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들은 학살과 피해와 관련해 제3자다. 그들의 행위가 국가의 위법적인 명령을 거부한 목숨을 건 의로운 행동이라 하더라도 제3자 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인재의 경우는 또 다르다. 자신의 가족 13명이 몰살당했다. 부역자, 부역혐의자로 잡힌 이들이 모두 자신의 가족을 죽이는 데 직접적으로 가담한 이는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의 원수나 다름없는 이들을 살려준 것은 앞선 이들의 의로운 행위와는 또 다른 것이다.

목숨을 살려준 의로운 행위에 경중이 있을 수는 없지만 이인재의 행위는 한국전쟁 당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의로운 행위임은 분명하다.

또한 목숨을 구한 이들의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인재가 목숨을 구한 것은 비단 진리 광장에서의 열 명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광에 도피했던 여성을 포함해 이인재로부터 태극 문양의 완장을 얻은 수많은 주민들이 포함된다. 이인재의 행위는 임자도에서 보복의 악순환이라는 고리를 끊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임자도에서 지방 좌익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이 약 1300명 정도이고, 군경수복 후에 부역혐의로 학살된 이들이 약 200명이라고 한다. 이 죽음의 섬이 생명의 섬으로 거듭나게 된 데에는 이인재의 선한 행동이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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