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 퇴행' UN 우려에도…여가부 "앞서 있다는 평가 받아"

박준이 2024. 5. 1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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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보도자료서 "성실하게 답변했다"
현장서 위원들은 성평등 체계 퇴행 우려
시민단체 "원론적인 말만 되풀이"
차별금지법, 비동의강간죄 등 입법 실태 지적

국제연합(유엔)이 한국의 성차별 실태 전반에 대해 우려하며 차별금지법 입법 추진, 여성가족부 폐지 철회 등의 의사를 확인했다. 하지만 정부는 '여성차별 철폐 관련 법 제도가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면서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내놨다.

16일 여가부는 지난 14일 스위스 유엔제네바사무소에서 열린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 제9차 한국 정부 본심의 결과에 대해 보도자료를 내고 "위원회 위원들은 심의 이후 '한국 정부의 여성차별철폐 관련 법 제도가 상당히 앞서 있다'면서 '위원들의 질의에 대해 체계적이고 성실하게 답변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고 언급했다"고 설명했다.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은 1979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에 관한 협약'으로, 한국은 1984년에 가입했다. 협약국은 각국의 국가보고서를 제출할 의무가 있으며 이행감시기구인 위원회로부터 심의 절차를 따른다.

그러나 현장에서의 분위기는 정부의 설명과는 달랐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날 심의에서는 여가부 폐지, 차별금지법 입법, 비동의강간죄 도입 등 한국 여성인권 실태 전반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현장에 참석했던 한국여성단체연합,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12개 여성시민사회단체는 전날 발표한 논평에서 "많은 CEDAW 위원들은 현 정부의 여가부 폐지 시도를 비롯한 심각한 성평등 정책 추진체계 퇴행과 한국 사회 안티페미니즘 경향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했다"고 전했다.

위원회 위원들은 여가부가 폐지될 경우 실질적 성평등 정책 추진과 여성 권리의 강화에 많은 제약이 따를 것이라고 우려하며 여가부 폐지 계획을 철회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이에 대해 정부는 "현재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으며, 이 개정안은 여가부의 양성평등 업무나 기능을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더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사회보장 총괄부처(보건복지부)와 통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히려 정부는 여가부가 다른 부처에 통합 개편될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부는 "양성평등 정책은 출산·양육, 건강, 소득보장, 노인, 장애인 등 사회정책 전반과 유기적으로 융합될 때 더 효과를 발휘할 수 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다수가 복지·고용을 다루는 부처에서 양성평등 정책을 통합하여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위원회는 차별금지법이 입법되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질의했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2007년 한국 정부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권고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향후 건설적 토론을 통해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라고 답했다. 성소수자의 권리 보장에 대해서도 다양한 질문이 나왔지만 정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반복한 것으로 전해졌다.

위원회는 형법 297조 강간죄를 동의여부로 개정하는 내용인 '비동의강간죄'에 대해 구체적인 입법 계획이 있는지도 물었다. 한국 형법에서는 폭행이나 협박에 의한 성관계만 '강간'으로 보지만, '피해자의 자발적인 동의 여부'를 강간죄의 구성 요건으로 둬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에 정부는 "비동의강간죄 도입은 피고인에게 사실상 입증책임이 전환되며, 여성의 의지를 폄하하는 것이라 더 심도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위원회는 일본 정부 대상 배상 판결 결과에 대한 이행 방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명예훼손과 모욕을 방지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법 개정에 대해 질의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2015년 한일합의 정신에 입각해 대응해 나가겠다"고 답변했다.

위원회는 가정폭력이 실질적으로 처벌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도 물었다. 경찰청 등 관련 통계에 따르면 가정폭력 신고 건수 중 실제 기소되는 비율을 10%에 못 미치고 있다. 이에 정부는 "현행 가정폭력처벌법에 따라 모든 사건을 송치하고, 임시조치를 통해 피해자를 보호하고 있다"며 원론적인 답변을 내놨다.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임신중지에 대한 구체적인 제도가 나오지 않았다는 질의에 대해 정부는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함과 동시에 임신 유지·종결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개선을 위한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으며, 향후 법 개정 완료 후 개정된 법령에 근거하여 관련 제도를 보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여성시민사회단체는 이날 심의 과정에 대해 "정부는 여가부 폐지가 성평등 기능을 축소하는 게 아니라는 입장만 반복했다"며 "양성평등위원회는 2023년 단 두 차례 서면으로만 개최되었고, 2024년 현재까지 한 차례도 개최되지 않는 등 성평등 정책 추진 심의·조정기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또 차별금지법 입법, '위안부' 피해자 지원법 개정 등에 대해 "원론적인 말만 되풀이한 채 구체적인 이행 방안을 밝히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날 심의에는 장관을 대행하는 신영숙 여가부 차관도 참석하지 않았다. 지난 2007년, 2011년, 2018년 심의에서도 모두 장관이 대표로 참석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심의에는 김기남 여가부 기획조정실장을 필두로 여가부, 고용노동부, 법무부, 복지부, 외교부 등 관계자가 참석했다.

박준이 기자 giv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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