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현실적 '동일인 관련자' 조사…왕래끊긴 가족 자료도 요구 [시대 뒤처진 대기업규제]

최현주 2024. 5. 1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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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기업에 다니는 A씨는 이른바 ‘공정위 전담팀’이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출할 대규모 기업집단 지정자료를 작성하고 검토하는 일을 한다. 지정자료는 공정위가 매년 공시대상 기업집단 지정을 위해 받는 계열사‧친족‧임원 현황 등이다.

A씨의 주요 업무는 1000명에 이르는 ‘동일인 관련자’ 조사다. 총수인 동일인의 배우자, 6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 계열회사, 비영리법인, 임원 등이 대상이다. A씨가 1년간 떼어 보는 주민등록등본, 등기부 등본 등 각종 등본만 1000통이 넘는다. 지정자료 제출 기한이 다가오면 석 달 정도는 매일 문자‧이메일‧전화에 매달린다. 동일인 관련자에게 자료를 요청하고 받아야 하는데, 연락두절·제공 거부 등으로 자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요청 자료를 못 받으면 공정위에 낼 소명 자료를 별도로 만들어야 한다. 가장 난감할 때는 개인사가 엮였을 때다. 지난해엔 동일인 관련자 B씨의 아들이 창업한 스타트업 때문에 애를 먹었다. B씨는 이혼후 전 배우자가 키운 아들과 왕래가 거의 없었다. A씨가 그 아들에게 서류를 요청하자 면박만 돌아왔다. A씨는 “요즘은 개인정보 유출에 다들 민감한 데다 특히 기업과 거의 관련 없이 사는 자연인에게 서류를 받기란 더 어렵다”며 “가끔 내 업무가 사돈의 팔촌 뒷조사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말했다.

김영희 디자이너

기업들은 대기업집단 동일인 지정 제도가 현실과 동 떨어졌다고 입을 모은다. 동일인 관련자와 합해 특정 회사 발행 주식 100분의 30 이상을 소유하고 최다 출자자이면 이 회사도 대기업집단에 포함된다. 재계에선 현실적으로 동일인 관련자의 주식 소유 현황을 다 파악이 어렵다고 호소한다. 예컨대 지난해 10월 공정위는 LG그룹 총수가 계열사를 누락했다는 이유(지정자료 허위 제출)로 경고 처분을 내렸다. 문제가 된 회사는 ㈜LG 사외이사가 지분 30% 이상을 보유한 법인 노스테라스와 LG유플러스 사외이사가 출자한 벤처투자사 인비저닝파트너스였다. 공정위는 사외이사들이 30% 이상 지분을 보유한 이들 업체를 LG 계열사로 봤다.

이들 동일인 관련자의 공시 및 신고 의무도 괴로운 요소다. 미공개 정보를 활용한 거래를 막기 위해서라지만 동일인 관련자들이 많다보니 현실적으로 공시가 불가능한 상황이 많다는 것이다. 예컨대 C그룹은 지난해 동일인의 4촌이 보유한 회사가 중소기업을 인수‧합병(M&A)한 일로 곤욕을 치렀다. 해당 업체가 M&A 검토 중이라고 공시했는데 6개월 후 실제 인수 사실을 공시하지 않아 공시의무 위반으로 적발됐다. C그룹의 공시 담당자는 “동일인과 4촌의 사이가 나쁜 데다, 해당 기업이 우리 쪽에 M&A 완료 사실을 알려주지 않으면 우리로선 공시할 수 없는 정보”라고 말했다.

재계에선 대기업집단 지정 제도의 시효가 지났다고 평가한다. 1986년 도입 당시엔 경제력이 대기업에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생겼지만 38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1980년대 65%였던 한국의 경제 개방도는 현재 91%로 확대됐다. 외국 기업이 언제든 진입할 수 있어 특정 기업이 독과점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내 기업도 내수보다는 해외 매출 비중이 크다. 10대 기업(매출 기준)의 해외 매출 비중은 평균 63%다.

김영희 디자이너

대기업의 매출 집중도도 줄고 있다. S&P캐피탈 IQ에 따르면 한국 전체 기업 매출 중 100대 기업의 매출 비중은 2011년 58.1%에서 2020년 45.6%로 줄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9개국 중 15위 수준으로, 100대 기업의 매출 집중도가 높지 않은 편이다. 유정주 한경협 기업제도팀장은 “대기업집단 지정 제도는 한국이 ‘폐쇄 경제’일 때 만든 제도로, 개방 경제로 바뀐 현재 상황과는 맞지 않다”라며 “한국에만 있는 낡은 규제는 고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동일인을 총수 개인이 아닌 그룹 내 핵심 기업으로 지정해 법인의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개인에 대한 처벌 위주 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홍대식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재는 과거 창업주 개인을 중심으로 한 피라미드형으로 기업집단을 운영하던 시절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며 “ESG공시 의무제까지 도입하며 기업 스스로 자율적 지배구조 개선 노력을 하는 상황에서 대기업 기업 집단 정책이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유인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현주 기자 chj8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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