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한동훈, 설령 쇼잉이라 해도 멋있다 [이진곤의 그건 아니지요]

데스크 2024. 5. 15.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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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비난하면서 미국행이라니
백팩 멘 게 대통령 눈에 띄었나?
절망의 늪에서 동료시민 구하라
지난 4·10 총선 참패에 책임을 지고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직을 사퇴한 한동훈 전 위원장을 서울의 한 도서관에서 봤다는 목격담이 잇달아 나오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SNS

정치인들의 꼴불견 행태 가운데 하나가 ‘미국 연수’다. 선거에서 낙선하면 그게 마치 정해진 코스인 것처럼 언론에 자랑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유명 대학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연구활동을 하고 학자들과 세미나도 갖겠다고 한다. 연구 주제나 활동 방안을 밝히고들 가지만 다녀와서 연구 성과를 국민들과 공유하는 사람은, 과문한 탓인지 아직 들은 적이 없다. 선거 떨어지고 갔다가, 아무리 오래 있어도 그 다음 선거 전에는 반드시 돌아온다. 철새 정치인이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붙여야 할 이름이 아닐까?

미국 비난하면서 미국행이라니

물론 아무나 그렇게 하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선거에서 낙선한 유력정당의 후보 ▲유력정당의 당내 대선 후보 경선에서 떨어진 후보 ▲유력정당 당권 경쟁에서 진 사람 정도는 돼야 한다. 요즘은 ▲서울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인사 ▲권력자 주변에서 유력인물로 주목받던 사람도 그 코스에 편승하고 있다. 패배의 기억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낯선 곳에서의 생활을 선택할 수가 있다. 실패에도 불구하고 정진하는 모습을 유권자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러는 지도 모르겠다. 학창시절에는 못 누려봤던 지적 호사에 대한 보상심리의 발로일 것도 같다.

정말로 학문적 목마름으로, 시간 여유가 생긴 기회를 이용해 미국 유수 대학에서의 연구를 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학마다 조건은 다르겠지만, 최소한 대학 캠퍼스에서 공부하고 연구하는 시늉은 할 수 있다. 혹시라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디오게네스를 흉내 내서 대낮에 등불을 들고 찾아야 할 만큼 드물겠지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준비를 늘 하고 있다는 사실을 꼭 알려주고 싶다.

미국은 멀리해야 할 나라라는 인식이 머리에 깊이 박혀 있을 것 같은 좌파정치인이 미국을 선호하고 미국에서 연구하겠다고 가는 것도 황당하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는 병법을 실천하는 셈인가? 국내에서는 미국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좌파 대중에게 아부하지만 속으로는 한 없이 부러워하는 대상이 미국인 것 같은데 오해인가? 자녀들을 베이징・모스크바・평양에 유학시키지 않고 미국에만 보내는 건 또 무슨 연유인지….

궁금한 것은 이뿐이 아니다. 체재비용 문제다. 미국에서 장기간 지내려면 돈이 많이 들 텐데 모두가 자비로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국내의 기관 단체 등에서 지원을 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현지 지인들의 도움에 의지할 수도 있겠다. 왜 외국에 가서까지 남을 귀찮게 하는지 그 심보를 이해하기 어렵다. 공짜 점심은 없다던데 나중에 뭐로 갚으려고 그러는 걸까? 연관되어 떠 오로는 전설 같은 실화가 있다.

백팩 멘 게 대통령 눈에 띄었나?

미국으로 피신해서 장기간 체재한 정치 유력자를 지성껏 모신 현지 교포 재력가가 그 갚음으로 훗날 대한민국의 요직을 섭렵했다. 그렇게 보답을 할 수 있는 입장이 되면 야 좋겠지만 그건 특별한 경우다. 교민 사회에 가서 이사람 저 사람에게서 많든 적든 신세를 지고 철새처럼 뽀로로 달아나버린 정치인도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즘이야 그런 사람이 있을까. 대개들 자비로 간다고 들린다. 정치를 사업, 더 직설적으로는 장사로 한 사람들일까?

15년쯤 전의 이야기다. 미국 뉴욕의 한 한국인 라디오방송에 주 1회씩 육성칼럼을 내보낸 적이 있다. 미국에 가 있던 모모한 정치인 두 사람인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귀국한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재보궐 선거 때를 맞춘 귀환이었다. 정치인이 국회에 재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그거야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교민들 신세져가며 그들을 상대로 자기PR하는 재미를 누리다가 기회가 생기니까 뒤도 안 돌아보고 서울행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교민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그래서 한 마디 했었다.

“미국에 계시는 동포 여러분은 특별한 목적도 명분도 없이 미국에 가서 장기간 머물며 외화 낭비나 하는 정치인들이 혹 있게 되면 엄하게 꾸짖어주십시오. 혹시라도 모모한 사람들 흉내나 내며 미국으로 갈 정치인이 있을까 걱정이 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쫓아 버리십시오”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국 정치인의 미국행은 이후로도 이어졌다. 그 중 한 사람이, 서울시장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오세훈 시장에게 패배한 후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선임연구원으로 갔다는 박영선 전 중소벤처사업부 장관이다. 작년 4월 18일 윤석열 대통령의 하버드대 연설장에 백팩을 메고 참석했다가 언론들이 그 점을 강조해 준 덕분에 ‘학구열 넘치는 전직 장관’으로 이미지 지어지는데 성공했다. 최근엔 윤 대통령이 국무총리직을 제의했다는 보도로 이름값이 상종가를 쳤다. “그만큼 얻은 게 많은데 개딸들에게 비난을 좀 받으면 어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박 전 장관은 그곳에서 제대로 연구를 한 모양이니까 귀국 후에 그 성과를 국민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절망의 늪에서 동료시민 구하라

정치인들의 미국행 이야기를 길게 쓴 것은 그와 반대되는 장면이 신문에 실려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1일 서울 서초구 양재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모습이 시민들에게 목격됐다. 거기서 악수를 청하는 시민들의 손을 마주 잡고, 셀카 인증샷에도 응했다는 언론들의 보도다.

“한 전 위원장을 목격했다는 한 누리꾼은 ‘(한 전 위원장을) 며칠 전 봤는데 오늘 또 와 계신다’며 ‘2층 열람실에 계시더라. 사람들이 매너 있게 많이 방해 안 하고 사인, 사진 찍는 사람 좀 있었다’고 전했다.”(국민일보, 5.12.)

늘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통해 당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들린다.(당 대표가 되지 말아야 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게 아니면 다른 사람들처럼 미국에 가서 공부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동안은 도서관 지킴이, 혹은 도서관 순례객의 여유를 누릴 시간 여유가 있다. 참패를 못 면한 장수가 미국으로 피신(?)해 가거나 국회의사당이나 정당 주변을 서성거리지 않고 도서관에서 독서를 즐긴다는 것은 놀라워해도 될 일 아닌가?

자기만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쇼잉(showing)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참신하다. 멋으로 치자면 ‘최상급’이다. 미국 가서 빈둥거리며 놀다가, 지인들과 골프를 즐기다가, 무료함에 한껏 하품을 하다가 무슨 대단한 연구 성과나 깨달음이 있었던 듯 으쓱거리며 귀국하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 그렇지 않은가?

한 전 비대위원장이 도서관에서 읽던 책은 김보영 작가의 『역병의 바다』였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읽지 못했다. 읽게 될 것 같지도 않다. 소설 안 읽은 지가 오래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전 위원장에게 부탁하고 싶다. 극단적 상호 혐오 속에 한 전 위원장이 호명한 ‘동료 시민’들은 공포와 절망의 심연을 경험하고 있다. 더욱이 폐쇄 구조 속에 완벽하게 갇혔다. 서로를 괴물로 단정, 처단하겠다고 설치는, 양측의 전사들이 득실거린다. 동료시민들을 혐오와 처단의 구렁에서 구해내 햇빛 환하게 비치는 겸애(兼愛)의 들판으로 이끌 수 있는 지혜를 찾고 배우시라.

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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