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어트 럭셔리' 그 후

김지회 2024. 5. 1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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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 도파민을 샘솟게 하는 쇼와 디지털 디톡스를 시도한 쇼가 극으로 치달았다.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1998년 SK텔레콤에서 대나무 숲을 스님과 걸으며 배우 한석규가 내레이션한 광고 카피다. 최근 열린 2024 F/W 컬렉션 기간엔 빠른 호흡으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패션 산업에 대해 잠시 브레이크를 걸고 고민하는 디자이너가 많았다. 물론 이 흐름은 고급스러운 기네스 팰트로의 법정 룩부터 올드 머니 룩을 지나 콰이어트 럭셔리 트렌드로 이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중 컬렉션 기간 동안 남다른 행보로 눈에 띄는 디자이너들이 있었다. 먼저 은근히 시선을 즐기는 고양이처럼 우아한 방법으로 화제가 된 건 ‘더 로우’의 선언문이었다.

Balenciaga / Avavav / Sunnei / Diesel / Vetements
Coperni / Diesel / Mugler / Off-White™ / Mugler

‘휴대폰 촬영 금지’ 선언을 하며 쇼가 바이럴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그들의 방식이 또 다른 화제를 낳은 것. 자리에 놓인 새하얀 노트에 연필로 기록한 간결한 실루엣과 우아한 움직임은 그날 쇼를 눈에 담아낸 이들만 느낄 수 있는 ‘콰이어트 럭셔리’였던 것이다. 흐름은 동양의 정적인 분위기로 이어졌다. 이제 막 파리 컬렉션에 발을 내디딘 마메 쿠로구치는 쇼를 위해 파리 마레에 있는 찻집 ‘오가타(Ogata)’로 초대했다. 사라져가는 전통 공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그녀가 이번 시즌에 표현하려는 건 ‘착용 가능한 도자기’. 그녀는 몇 달 동안 도예가들과 함께하며 영감을 얻었는데 도자기를 굽는 과정에서 남은 재의 흔적, 그곳에서 발견한 희귀한 토기 조각 등을 컬러와 디테일에 반영했다.

Valentino / Stella Mccartney / Christian Dior / Giada
Mame Kurogouchi / Fendi / Bottega Veneta / AlaÏa / dries Van Noten

사운드트랙 역시 쇼에 빠져들게 만든 요소 중 하나. 피아노와 가마 불이 타는 소리를 교차해 마치 명상하는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언더커버의 준 다카하시는 책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공원을 가로질러 통근하는 청소부의 일상을 담은 영화 〈퍼펙트 데이즈 Perfect Days〉에서 영감받아 쇼를 완성했다. 그는 쇼의 사운드트랙을 위해 영화를 만든 감독 빔 벤더스(Wim Wenders)를 찾아가 영화 속에 등장했던 청소부와 같은 평범한 여성에 대한 시를 쓰고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공원처럼 넓은 쇼장을 산책하듯 거니는 모델의 걸음 사이로 싱글 맘에 대한 시가 나지막이 흐르며 쇼에 감동을 더했다. 앞서 언급한 쇼들이 싱잉 볼과 시, 앰비언트 음악으로 동트기 전의 고요한 시간을 떠오르게 했다면 흠뻑 취한 금요일 밤과 잠 못 드는 새벽을 느끼게 한 쇼들도 있었다.

THE ROW

“우린 ‘콰이어트 럭셔리’를 추구하지 않아요.” 2024 F/W 컬렉션을 앞둔 이자벨 마랑의 유쾌한 한 마디는 최근 패션 트렌드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깨닫게 했다. 트렌드와 상관없이 자신의 갈 길을 선언한 그녀는 예술감독 킴 베커(Kim Bekker)와 쇼를 준비하며 말했다. “브랜드의 뿌리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서부영화를 연상시키는 음악과 함께 생동감 넘치는 걸음걸이로 등장한 모델들은 광택감이 흐르는 페이턴트 소재와 레오퍼드 프린트, 리듬감 있게 움직이는 프린지 장식으로 브랜드 초기의 에너지 넘치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가 하면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잘리아는 시대의 모습을 정면 대응하는 기지를 발휘해 쇼장을 콘텐츠 과부하 속으로 옮겨놓았다. 노을지는 산과 빙하, 사막을 배경으로 시작한 쇼는 콜라주 형태로 뒤죽박죽 뒤섞였고 뒤이어 화면엔 AI가 만든 수백만 명의 틱톡커가 등장했다.

Blumarine
Diesel
Kei Ninomiya
콘텐츠를 해체하고 편집해 무엇이 실제하는 것인지 혼란에 빠뜨린 광경마저 스트리밍하는 쇼라니!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무심하게 껌을 씹으며 걷는 모델들은 규칙없이 테이프로 옷을 휘감아 자신의 모습까지 콘텐츠처럼 편집한 것 같았다. 쇼가 절정으로 치닫자 디지털 세상에 갇힌 혼란스러운 쇼는 더 이상 방영할 프로그램이 없는 TV처럼 노이즈 가득한 화면과 함께 정적 속에 마무리됐다. 디자이너들은 한 편의 유튜브 영상 분량에 한 시즌의 컬렉션을 색다르게 보여주기 위해 수많은 돈과 인력을 들여 사람을 이끈다. 이 역시 넘쳐나는 콘텐츠 중 일부. 누군가는 샘솟는 도파민 샤워를 즐기기로 했고, 누군가는 텅 빈 고요 속에 남겨두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단지 디자이너의 문제는 아닐 터. 자, 이제 쇼가 시작됐다. 당신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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