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못하는사회]②법 사각지대 교제폭력…상담도, 처벌도 어렵다

박준이 2024. 5. 14.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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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스토킹·여성폭력법에 명시 안돼
제도 공백 상태, 8년째 계류된 국회법
영국처럼 '강압적 통제' 폭력에 포함해야

연인 관계나 헤어진 관계에서 언어·신체 폭력을 가하는 교제 폭력, 살인이 빈번하지만 이를 규제하거나 처벌할 수 있는 법 제도는 미비하다. 현행법상 교제 폭력은 폭력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아 피해자가 겪고 있는 상황 자체를 정의하기부터 쉽지 않다. 이 때문에 피해자가 친밀한 관계로부터 폭력 등의 위험에 처해 경찰서나 상담소를 찾아가도 실질적인 지원을 받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미지출처=게티이미지]

최근 10년 가까이 국회에서는 관련 법이 폐기된 가운데 교제 폭력의 전조 증상부터 대응할 수 있는 법적 장치에 대한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매일 1명씩 당하지만, 제도는 사각지대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여성 폭력 줌인'에 명시된 매뉴얼(한국여성의전화 출처)에 따르면 교제 폭력은 데이트 관계에서 발생하는 언어적·정서적·경제적·성적·신체적 폭력을 의미한다. 교제 폭력의 종류에는 폭언, 폭행 등의 직접적인 폭력적 요소뿐 아니라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등의 경제적인 요소와 일상적으로 일정을 통제하고 간섭하거나 옷차림을 제한하는 등의 통제적 요소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명시돼 있다.

국회 본회의장. 사진=김현민 기자 kimhyun81@

하지만 현재 가정폭력범죄 처벌법, 스토킹 범죄 처벌법, 여성폭력방지기본법 등 폭력과 관련된 법에는 교제 폭력 조항이 포함돼 있지 않다. 가정폭력범죄 처벌법상 가정폭력의 대상은 배우자, 직계존비속관계 등 가정구성원에만 해당한다.

스토킹 범죄 처벌법 역시 '상대방 또는 그의 동거인, 가족에게 접근하거나 따라다니거나 진로를 막아서는 행위' 등 스토킹 행위만을 규정하고 있다. 여성폭력방지기본법 상 여성 폭력에는 '집단 따돌림, 폭행 또는 폭언, 그 밖에 정신적·신체적 손상을 가져오는 행위로 인한 피해'로 그 범주가 넓다.

이 때문에 교제 폭력처럼 연인관계의 특수성이 존재하는 사례는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 전지혜 경찰청 여성안전기획 계장은 "교제 폭력 같은 경우 법적 정의가 따로 없어 기존 형법에 있는 폭행·상해·감금 등이 연인 사이에 발생하면 이를 '교제 폭력'으로 정의하고 있다"며 "단순히 연인 사이에 '때렸다'고 해서 피해자를 보호할 수 없는 것을 가장 큰 애로 사항으로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스토킹이나 가정 폭력 같은 경우 피해자 보호하기 위해 접근 금지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교제 폭력은 그렇지 않다"고 덧붙였다.

관계부처, 상담 기관에서도 "지원 어렵다"

주무 부처인 여성가족부에서는 산하 통합상담소를 통해 교제 폭력에 대한 상담 지원을 하고 있다. 또 '2024 여성·아동권익증진사업 운영지침'에 따라 가정폭력·성폭력·스토킹·교제 폭력 피해자를 대상으로 무료법률, 상담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법적 근거가 없이 지침과 매뉴얼로만 운영되고 있어 피해자들이 지원 내용을 알지 못하거나 특정 상황에서 상담 연계를 받기 어려운 경우가 발생한다.

신보라 한국여성인권진흥원장은 "지난해 여가부에서 교제 폭력 피해자도 피해자 지원기관을 통해서 상담·긴급 보호·의료·법률·주거지원 등을 지원하도록 운영지침과 매뉴얼을 배포했지만 교제 폭력 피해자도 지원받을 수 있다는 정책 홍보가 부족한 상황"이라며 "교제 폭력 피해자를 보호·지원하는 체계를 국가가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교제 폭력으로 어려움을 겪는 적지 않은 피해자들이 민간 기관으로 향하고 있다. 한 민간 여성 폭력 상담센터 관계자는 "접수된 상담 10건 중 3~4건 정도는 교제 폭력"이라며 "관련 법이 없다 보니 경찰에 접수되기가 어려워 상담, 의료 지원이 어려운 일이 많다"고 토로했다. 이어 "여성 폭력, 성폭력, 가정폭력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으면 대처가 어렵다"며 "사건을 조사할 권한도 부여되지 않아서 갈등이 생길 경우 민사 소송으로 대응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8년째 버려진 법안들, '강압적 통제' 적용해야

국회에선 교제 폭력을 범죄로 규정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내용의 법률 제·개정안이 여러 차례 발의됐으나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계류되거나 폐기됐다. 교제 폭력 관련 법안이 발의된 건 지난 19대 국회에서 박남춘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표 발의로 '데이트폭력 범죄 처벌 특례법'이 발의된 이래 21대까지 총 8건이다.

발의된 법안들은 크게 '데이트폭력 범죄'를 특례법으로 별도 명시해 제지, 처벌 등의 피해자 보호 대응이 가능하도록 하거나 현행 가정폭력범죄 처벌법상에 포함하도록 했다. 이 밖에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 조치 등의 적극 조치(신보라 전 의원 등)도 규정이 필요하다고 봤다. 또 '반의사불벌조항'을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법안(김미애 국민의힘 의원 등)도 발의됐다.

해외에선 다수의 국가가 교제 중인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처벌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법에 명시하고 있다. 영국의 '가정폭력방지법'에서 가정폭력은 '16세 이상의 개인적으로 관계가 있는 개인들 간의 행위가 폭력적이었을 경우'로 규정하고 있다. 혈연·혼인 관계로 이루어진 가족 구성원 간에 발생한 폭력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폭력에 대해서도 가정폭력방지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특히 학계에서는 교제 폭력에 대한 단순 법적 규정을 넘어서, 연인 간에 발생하는 통제성 자체를 가정폭력의 범주에 포함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심각한 폭력과 살인 등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초기 단계에서 예방할 수 있는 근본적인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영국 법에서도 '강압적 통제'를 가정폭력 요소에 포함시켜 강압적이고 통제적인 행동으로 상대방의 자유를 빼앗는 행위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김상균 백석대 경찰학과 교수는 "어디까지를 강압적인 통제로 볼 것인지, 통제성의 개념을 얼마나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며 "실제 상담 센터에서 피해 여성들의 사례를 분석해 통제 행위에서 발견되는 일정한 패턴을 분석해 범죄 구성 요건을 구체화하는 게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이유로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처벌이 미미한 점도 보완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결국 이를 반영할 수 있는 폭력 법 전반의 개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국회에 발의된 법만으로는 예방 단계에서 대응할 수 없다는 의미다. 김수정 한국여성의전화 상담소장은 "현행 가정폭력범죄 처벌법은 가정 유지를 목적으로 만들어져 있어 피해자 보호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며 "교제폭력 등 범죄의 종류가 세분되는 만큼 여러 범죄를 포괄할 수 있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편집자주 - 하루 평균 1.23명. 지난해 연인 관계인 남성으로부터 살해당하거나 당할 뻔한 경험이 있는 여성의 숫자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수많은 여성은 연인에게 삶의 위협을 느끼며 두려움에 떨고 있다. 끊이지 않는 교제 폭력을 두고 전문가들은 상대방에 대한 '통제 욕구'라는 전조 증상을 살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시아경제는 총 2회에 걸쳐 폭력으로 자각하기 어려운 교제 폭력 피해 사례와 이를 막기 위해 필요한 법적 대안을 살펴본다.

박준이 기자 giver@asiae.co.kr
이서희 기자 daw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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