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의 영화몽상] 느리게 걷는 도시와 영화

이후남 2024. 5. 14.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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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남 문화선임기자

영화 속 스님이 맨발로 걷는다. 한국에선 마침 맨발 걷기가 유행이다. 신발을 벗고 걷는 모습이라면 전국 각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완연히 다른 점은 그 속도다. 이 스님은 땅에서 발을 떼어 다시 내딛는 동작을 쉼 없이, 하지만 아주 느리게 이어간다. 인파의 왕래가 잦은 곳이든, 한적한 골목이든 마찬가지다.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이나 촬영 당시 현장에서 포착된 각종 소리가 없었다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영화가 아니라 스틸 사진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차이밍량 감독의 ‘행자’ 연작 중 ‘무소주’.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이 영화는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무소주’.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던 ‘애정만세’(1994) 등으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대만 감독 차이밍량의 연작 ‘행자’ 중 한 편이다. 그는 10여년 전 다시 베니스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직후 더는 산업 시스템의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단짝 배우 리캉생과 함께 시작한 프로젝트가 ‘행자’ 다. 첫 편의 대만 타이페이를 시작으로 ‘무소주’의 미국 워싱턴 DC까지, 세계 곳곳을 걸으며 촬영한 연작이 어느덧 열 편. 모두 이번 전주에서 상영됐다. 이번 영화제의 많은 상영작이 그랬듯 이 연작 역시 여러 편이 매진됐다.

‘무소주’ 상영 직후 감독과 배우는 영화평론가 정성일과의 대담을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연작에서 느리게 걷는 동작은 두 사람이 함께 연극을 준비하던 도중에 나왔단다. 연작 속 스님은 당나라 승려 현장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의 모델이기도 한 현장은 그 옛날 멀고 험한 길을 마다치 않고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왔다. 연작의 스님이 추위와 더위, 혹은 주위 시선에 아랑곳없이 걸음을 이어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요즘은 빨리 감기도 모자라 영화나 드라마의 축약본 영상을 찾아보는 시대다. 한데 이 영화는 그렇게 봐서는 전혀 의미가 없다. 애를 쓰고 따라가야 할 줄거리가 없을뿐더러, 일상의 속도와 전혀 다른 느린 걸음이 핵심이다. 덕분에 배경이 된 도시의, 걷는 주변의 공간과 시간을 새롭게 음미하게 된다.

영화의 맛으로 한껏 불러진 배를 소화하는 데도 걷기는 제격이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 거리’ 근처에는 한옥마을을 비롯해 걷기 좋은 곳이 많다. 차이밍량은 ‘행자’ 연작의 11번째 영화를 전주에서 찍겠다고 밝혔다. 낯선 이의 눈과 느린 걸음이 이 도시에서 무엇을 포착할지 궁금하다.

덧붙이면, 이번 영화제에서 도시를 걷는 또 다른 영화를 만났다. 김태양 감독이 4년에 걸쳐 찍은 세 편의 이야기를 한데 묶은 ‘미망’이다. 첫 편부터 등장인물들의 발길을 따라 서울 도심의 광화문광장과 을지로 주변 골목이 거듭해서 등장한다. 이야기의 초점은 인물들 사이의 감정인데, 마치 이들과 함께 도시를 걷고 구경하는 기분이 든다. 영화제 이후 극장가 개봉이 기다려진다.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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