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깃든 나의 영역

윤정훈 2024. 5. 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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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탈로그’의 대표이자 <월간 생활 도구> 를 쓴 김자영, 이진주가 생활이 배어든 공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ralph feiner

출근 시간이 지나 고요하게 가라앉은 서울 도심을 지나 성북동 최순우 옛집에 닿았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모호한 평지를 걷다 갑자기 언덕을 오르고 그만큼 계단을 다시 내려가면 색종이처럼 네모반듯한 앞뜰을 가진 집이 나온다. 1930년대 후반, 부동산 개발업자가 지은 한옥이니 건축적으로 특별할 건 없지만 방문자가 마주하는 장면은 그렇지 않다. 나무 창살에 코를 갖다 대면 단유리 너머로 사랑방에 드문드문 자리한 소목과 백자가 보인다. 창을 하나 더 건너면 뒤뜰의 나무와 풀꽃이 선연하다. 깊은 산을 들어가듯 발길을 옮겨 디딤돌을 따라 걸었다. 이때 식물에 감탄하며 앞만 보면 발이 푹 젖고 만다. 디딤돌이 세 갈래로 나뉘는 지점에 큼직한 물받이 그릇이 하나의 석물처럼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오지 않아도 늘 물이 가득 차 있다.

옛집에서 돌아와 우리 집을 들여다보았다. 두어 번의 이사를 거치며 식탁 모서리가 닳아 뭉툭해지고 나서야 손님을 초대해 밥을 먹는 게 편해졌다. 나무 의자에는 고양이 발톱 자국이 가득하다. 새것의 광택과 날렵함은 사라졌지만 그사이 너그럽고 생동감 있는 집이 됐다. 한적하고 고고한 옛집이 마음에 남아 그날 오후에는 식구들의 흔적을 정리했다. 아이가 큼직한 글자로 꾹꾹 적은 사랑의 말들, 보석이라며 집어온 조각을 나무 상자에 담았다. 밝고 부드러운 자작나무 상자에는 ‘사랑해요’부터 ‘다시는 안 그럴게요’까지, 극과 극을 오가는 편지와 암호문이 가득하다. 아이의 성장을 관찰해 기록하고 있는 10년간의 메모와 함께 이 집에서 가장 애틋한 사물이다. 먼지가 골고루 쌓인 책장과 책머리는 책솔로 쓸고, 말라버린 아보카도 줄기를 드디어 뽑았다. 화분 솔로 죽음의 흔적을 털어내고 슬슬 나무가 돼가는 레몬 줄기에 새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유독 목재 빈티지 가구만 골라 신나게 긁는 고양이의 흔적은 가구 관리 오일로 지워본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에는 정돈하고 관리하는 도구가 많다. 일단 들인 물건은 오래 쓰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다. 늘 물을 뿌려 식물도 석물도 반질반질했다는 옛집의 뒤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솔과 헝겊을 들고 닦다 보면 손길이 닿는 시간만큼 애정이 쌓인다.

해발 1526m에서 스무 명 남짓한 주민이 모여 사는 스위스의 외딴 산골 마을 라이스(Leis)에는 스위스 건축가 페터 춤토르가 설계하고 지은 3층짜리 나무 집 세 채가 있다. 우리가 이곳을 찾은 날에 눈사태주의보가 발령됐다. 허리춤까지 눈이 쌓이고 안개도 짙은 데다가 산길은 좁고 구불구불해 오르는 내내 긴장됐다. 약속한 장소에 미리 놓인 열쇠를 찾아 나란히 서 있는 세 채 중에서 가운데 집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진한 나무 내음이 우리를 맞았다. 춤토르의 아내인 아날리사(Annalisa)의 오랜 소망을 담아 주요 구조부터 바닥과 천장, 계단을 비롯해 욕조와 세면대까지 온전히 목재로 지어진 집은 한눈에 봐도 섬세한 안목으로 고른 가구와 집기로 채워져 있었다. 산자락 아래 마을이 보이는 커다란 창 앞에 놓인 긴 나무 테이블에는 현지인이 즐겨 먹는다는 빵의 레서피가 지역에서 난 밀가루, 효모와 함께 놓여 있었다. 그날 오후 찬장에서 볼을 꺼내 레서피에 따라 밀가루를 반죽하고 스무 시간을 발효시켰다.

다음 날 오븐에서 동그랗게 구워진 빵을 나눠 먹으며 우리는 실제로 이곳에 산다면 어떨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눈은 끊임없이 내렸지만 올라올 때만 해도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했던 새하얀 풍경이 어느새 아늑하게 느껴졌다. 나흘을 보냈을 뿐인데 3층 나무집은 그간 경험한 어떤 호텔보다 애틋하고 정답게 기억에 남았다. 아마 우리끼리 느긋하게 빵을 굽고, 책을 읽거나 보드게임을 하며 일상을 보낸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이 깃든 공간은 유대감과 안정감을 주는 내 영역, 나의 집이 된다. 집의 물건도 다르지 않다. 똑같은 모양으로 셀 수 없이 제작된 공산품도, 장인이 만든 유일무이한 공예품도, 한 시대를 이끈 디자인 철학이 담긴 가구도 내 생활이 배어들어야 오롯한 ‘내 집 물건’으로 자리 잡는다. 우리 집에서 쓸모를 넘어 생활의 리추얼이 깃든 사물을 꼽아봤다. 매일 밤 잠들기 전 에센셜 오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침대 머리맡의 아로마 스톤, 아이가 태어난 해에 시작해 7년째 기록하고 있는 10년 메모, 눈 감고도 꺼낼 만큼 익숙한 순서로 주방 서랍에 가지런히 정렬된 부엌 칼, 매일 아침 아이의 잠자리를 정리할 때마다 코를 박게 되는 아이 내음 가득한 베개 커버가 우리 집을 만든다.

김자영 · 이진주
건축학과 입학식에서 만나 엔지니어와 건축가로 일하던 서른 즈음 ‘카탈로그’라는 작은 생활용품 상점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김자영은 서울에서, 이진주는 스위스에서 지내고 있다. 〈월간 생활 도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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