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m×13m 태극기가 주는 용기와 자부심 [내 인생의 오브제]
첫 번째, 마치 오징어 게임 참가자처럼 모든 직원이 갈색 유니폼을 입고 있다. 신발은 크록스 실내화. 말단 사원부터 회장까지 똑같다. 두 번째는 하얀 벽면에 요란한 구호들이 고딕체 글씨로 붙어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다. “전쟁에서 지면 노예가 되고 경쟁에서 지면 거지가 된다” “사소함이 혁신의 시작이고 명품의 완성이다” “회사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곳이 아니고 해야 할 일을 하는 일터이다” 등등. 이런 금언들이 모두 29개.
이 두 가지에 대한 황철주 회장의 설명은 이렇다.
“몰입입니다. 직장에 와서는 업무에 집중해야 합니다. 저는 일이 없으면 한 달을 출근 안 해도 좋다고 말합니다. 1주일에 하루만 나와도 됩니다. 그러나 일할 때는 게으름 피우는 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빈민국이 개도국이 되는 데는 헝그리 정신이 필요했다. 개도국이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정신 경쟁력이 중요하다. 황 회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직원들의 의식을 바꾸는 일이다. 그리고 도저히 못 보고 지나칠 수 없는 세 번째 특이점. 현관에 들어서면 1층 벽면에 붙어 있는 태극기다. 가로 18m, 세로 13m 크기. 그 앞에 사람이 서면 왜소하기 그지없다.
1985년 인하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황철주는 현대전자에 입사한 뒤 네덜란드 장비 업체인 ASM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 회사가 모든 반도체 회사들이 쩔쩔매는 그 유명한 ASML의 전신이다. ASM 한국지사에 근무하던 시절, 삼성, 현대전자 관계자들과 ASM 장비 구입차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로 출장을 갔다. 그때 사막 한가운데 주유소에서 그의 표현대로라면 가슴 뭉클한 무언가를 봤다. 대형 성조기였다.
“국기는 통상 기념일이나 특정 시간에 게양하는데 이들은 이렇게 아무 때나 걸어놓는구나. 그 성조기의 위용에서 미국인의 자신감과 열정이 느껴졌고 무슨 일이라도 용기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월이 흘렀다. 1993년 ASM이 한국에서 철수하자 그는 창업을 결심하고 주성엔지니어링이란 회사를 세운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 같았지만 놀랄 만한 기술력으로 사업은 탄탄하게 기반을 다졌고 1997년엔 반도체 장비 기업으로는 최초로 수출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위기가 닥친다. 외환위기 이후 비즈니스 환경이 안 좋아진 데다 삼성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삼성 고위 임원의 친인척이 주성의 개발책임자로 근무했고 그가 스톡옵션으로 주성 주식을 보유했다는 걸 빌미로 삼성이 대대적인 자체 감사를 실시했다. 삼성은 주성과의 납품 관계를 끊었다. 예상치 못한 중소벤처기업의 급속 성장의 결과가 수많은 억측을 만들어낸 사건이었다. 황 회장은 막막했다. 돈도 있고 기술도 있었다.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주위의 시선을 싸늘해졌고 희망을 찾지 못한 직원들이 하나둘씩 그만두기 시작했다. 애리조나 주유소의 성조기가 떠오른 건 이때였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태극기를 주문했다.
“태극기는 나에게 용기를 줍니다. 어려울 땐 태극기가 생각납니다. 직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국가대표다. 그런 자부심을 말이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또 다른 기술을 준비하고 있는 혁신 전도사 황철주. 24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새벽 출근길을 반기는 태극기가 황 회장에게 말을 건다. “오늘은 더 좋은 날입니다. 용기를 잃지 마세요”라고.
[손현덕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9호 (2024.05.15~2024.05.2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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