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거수일투족 감시당하던 아들의 죽음 이후 드러난 끔찍한 진실

김선재 2024. 5. 13.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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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민주화운동 희생자 최온순 열사

[김선재 기자]

  육군이병 최온순의 묘 (장병 1묘역 107-678호)
ⓒ 김선재
 
1980년 8월 27일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전두환씨를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곧이어 전두환은 독재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는데요. 1980년 5월부터 신군부에 맞서 가장 선두에서 싸웠던 세력은 바로 대학생이었습니다. 전두환은 대학생의 강력한 반정부 시위와 투쟁을 꺾어버리기 위한 극단 조치를 시행합니다. 바로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이었습니다.

1980년 9월부터 1984년 11월까지 전두환 정권은 학생운동에 참여한 사람 중 일부를 강제로 군대에 입대시켰습니다. 병역법 등에서 정한 절차는 깡그리 무시된 인권침해였습니다. 학생운동 중에 시위를 주도한 사람이 대상자였으며, 징병 연령, 신체 상태, 면제 사유 등 전혀 고려되지 않고 징집당했습니다. 억지로 군대에 보내진 사람 중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 연령에 미달한 사람, 3대 독자도 있었습니다. 징집된 사람 중 육군으로 간 사람은 전원 최전방 GOP 사단에 배치되었고, 해군은 서해 5도 지역과 함상에 배치되었습니다.

강제징집에 대한 각계 항의가 거세지고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1984년 11월 13일 병무청은 '제적학생 병역처리 지침'을 개정하여 강제징집이 폐지되었는데요. 강제징집 피해 인원은 총 1152명이었습니다.

녹화사업은 1982년 9월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82년 전반기 청와대 업무보고 자리에서 보안사령부 최경조 대공처장은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질책을 받는데요. "운동권 세력에 대해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보안사령관 박준병, 참모장 정도영, 대공처장 최경조는 녹화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기에 이릅니다.

녹화사업은 폭력으로 강제된 사상개조였습니다. '녹화'는 '좌경사상으로 붉게 물든 학생들의 생각을 푸르게 순화시킨다'는 의미였습니다. 강제징집된 사람을 A, B, C급으로 구분해 관리했는데요. A급은 보안사령부 심사과에서 B, C급은 사단이나 군단 보안부대에서 순화 교육을 받았습니다.

보안사는 휴가를 주면서 함께 활동한 선후배 동료의 행적을 캐오라고 강요했는데요. 학생운동권 동향 파악을 위한 이른바 '프락치 공작'이었습니다. 녹화사업 대상자를 끌고 가 수일 동안 감금하고 가혹행위도 저질렀는데요. 피해자는 정신과 육체가 파괴되었습니다.

보안사는 파악한 정보로 운동권 조직 사건을 조작했고,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는 세력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인 대학생, 노동자와 재야인사도 불법으로 연행되어, 보안사령부 분실에서 조사받기도 했습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총 1192명에 대해 녹화사업을 실시했다고 밝혀졌습니다. 피해자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박탈당했고, 신체 자유도 통제받았습니다.     

녹화사업의 희생자들
   
 강제징집 녹화사업 6명의 희생자 1한양대학교 기계과 81학번 한영현, 2고려대학교 정경계열 80학번 김두황, 3연세대학교 영독불계열 81학번 정성희, 4성균관대학교 사학과 81학번 이윤성, 5서울대학교 기계설계과 한희철, 6 국대학교 수학교육과 81학번 최온순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 과정에서 정성희(연세대, 82년 7월 23일 사망, 5사단), 이윤성(성균관대, 83년 5월 4일 사망, 5사단), 김두황(고려대, 83년 6월 8일 사망, 22사단), 한영현(한양대, 83년 7월 2일 사망, 7사단), 최온순(동국대, 83년 8월 14일 사망, 15사단), 한희철(서울대, 83년 12월 11일 사망, 5사단) 이렇게 총 6명이 사망합니다. 이 중 장제징집과 녹화사업 피해자이며 민주화운동 열사 희생자인 최온순 이병이 대전현충원 장병 1묘역 107-678호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최온순 열사는 1963년에 태어나 1981년 경기고를 졸업하고 같은 해 3월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흥사단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했는데요.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흥사단 아카데미에 가입해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학교에서는 공식 동아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지만, 1980년대 흥사단 아카데미 회원들은 한국 사회 문제에 대한 세미나와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그 과정에 더 많은 학생을 묶기 위해 각종 집회도 주도합니다.

1981년 8월 동국대 흥사단 아카데미를 이끌던 선배가 중구경찰서에 연행되었고 이윽고 조직이 드러나게 됐습니다. 최온순 열사와 14명 회원은 경찰 수사망에 오르게 되는데요. 학내에서 집회와 시위가 있을 때마다 중부경찰서 형사들은 흥사단 아카데미와 학우를 떼어놓으려 했고, 일부 회원에게는 장학금을 주겠다며 회유했습니다.

최온순 열사는 1981년부터 1982년까지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규명'과 '5공 파쇼정권 퇴진'을 위한 여러 시위와 집회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이론 문제보다는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향이었는데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과감하게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졸업 이후에는 노동운동으로 진출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고 최온순 열사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동국대학생들은 1983년에도 마찬가지로 집회와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3월 29일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요. 학생 한 명이 불심검문에 걸렸고 마침 소지하고 있던 유인물을 압수당하는 바람에 계획이 탄로 나고 말았습니다. 3월 21일과 22일 사이 총 40여 명의 학생이 검거되었는데요. 이때 최온순 열사 역시 임의동행으로 경찰서에 연행되었습니다.

연행된 후 경찰서에서 4~5일 동안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는데요. 중부경찰서 정보과 형사는 시위 계획과 조직에 대해 집중해서 캐물었습니다. 마침내 조사가 끝났지만 최온순 열사는 집으로 귀가할 수 없었습니다. 그와 함께 끌려간 5명 학생은 시위 주동자로 간주되어 강제 징집 대상자가 되었습니다.

3월 27일과 28일 병무청 직원이 중부경찰서로 찾아왔고, 입대지원서를 써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3월 29일 경찰서로 찾아온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그대로 경찰버스에 실려 103보충대로 입대했습니다. 15사단 신병교육대에서 신병훈련을 이수 후 83년 5월 17일 39연대 3대대 9중대로 배치되었습니다.

최온순 열사는 "어찌 되었건 군에 입대했으니 잘해보자"면서 부대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동작이 굼떠 고참으로부터 가끔 "빨리 움직이고 열심히 하라"는 충고를 들었지만 고참의 말에 잘 따랐습니다. 가끔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후임병에게 간식도 나눠주는 배려심 깊은 군인이었습니다.

그를 괴롭히는 원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동국대에서 시위를 하다가 군대에 끌려왔다는 이른바 '특수학적변동자'라는 꼬리표였습니다. '특수학적변동자'라는 이유로 소대장들은 처음에 최온순을 자기 소대로 데려가기 꺼려했습니다. 신상카드에도 공개되어 있어서 행정병 뿐 아니라 소대원 대부분 그가 강제로 징집당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대대 보안주재관은 1주일에 2~3번씩 중대장, 소대장, 행정반을 통해 동향을 속속들이 파악했는데요. 편지가 어디서 오는지, 책이나 소포가 오는지, 언행과 내무 생활에 특이점은 없는지 감시했습니다. 보안주재관은 직접 최온순 열사를 찾아가거나 불러 면담을 하기도 했는데요. 최온순 열사에게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었습니다. 중대장은 소대장과 분대장에게 동향을 주시하라고 지시했고, 간부들은 동향과 면담 내용을 낱낱이 보고했습니다.

또 최온순 열사는 부대에 전입온 지 1개월쯤 지났을 무렵 1주일 정도 보안부대를 다녀오기도 했는데요. 당시 보안부대에서는 1주일에 한 명 정도 특수학적변동자를 불러 2~3평 좁은 공간에서 순화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최온순 열사 역시 순화교육이라 부르는 녹화사업을 받았을 가능성이 큰데요. 훗날 조사에서 끝끝내 보안부대 관계자들은 입을 닫았기 때문에 명백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드러난 진실
 
 민주열사 고 최온순 추모비
ⓒ 추모연대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1983년 8월 14일 '급위독' 세 글자 전보가 본가로 전해집니다. 가족이 부랴부랴 부대로 찾아갔으나 열사는 이미 숨을 거뒀고,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헌병대 수사관은 가족에게 열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설명했는데요. GOP 초소 근무 중에 목 아래에 총구를 대고 총을 발사해 총알이 목을 뚫고 머리에 박혀 즉사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족은 최온순 열사가 절대로 자살할 리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안실에 안치된 시신을 1주일간 지키면서 재수사와 진상규명을 요구했습니다. 유족이 강력하게 항의하자 헌병대는 수사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는데요. 이윽고 끔찍한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1983년 8월 14일 새벽 5시 20분 헌병대 수사관 2명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최온순 이병과 함께 근무한 김 아무개 상병은 "최온순이 자신과 싸우다 자살하였다"고 진술했습니다. 목에 난 상처도 통상 자살과 동일했기에 자살로 처리되었는데요. 이는 완전히 조작된 내용이었습니다. 이후 드러난 진술에 의하면 사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8월 13일 오후 7시 50분부터 최온순 이병과 김 아무개 상병은 51초소 야간근무에 투입되었습니다. 밤샘 근무가 지나고 철수를 준비하던 14일 4시 30분 무렵 사건이 터지는데요. 순찰을 돌던 소대장은 초소에서 함께 졸고 있던 최온순 이병과 김 아무개 상병을 발견하고는 크게 질책했습니다. 소대장이 떠난 후 김 아무개 상병은 최온순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구타를 퍼부었는데요.

엎드려 뻗친 상태에서 구타를 당하던 최온순이 갑자기 일어나 "못하겠다"며 김 아무개 상병과 치고 받고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김 아무개 상병 진술에 따르면 그 순간 분을 삭히지 못한 최온순이 총을 들어 위협을 했고, 김 아무개 상병도 총을 들고 싸우는 도중에 총구를 최온순의 목 아래에 밀면서 방아쇠를 당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후 육군 과학수사연구소에서 김 아무개 상병 총과 옷을 감정했는데요. 김 아무개 상병 총에서 발사한 탄피 흔적이 현장에서 발견된 탄피의 흔적과 같았고, 화약 흔적도 김 아무개 상병 옷에서 많이 검출되었습니다. 김 아무개 상병은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지만, 1983년 9월 13일 군법회의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징역 7년을 선고했습니다.

재수사 결과 열사가 자살했다는 사실은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당시 자행되었던 녹화사업의 구체 내용은 아직도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 당시 책임자들이 제대로 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열사가 보안부대 녹화사업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간부와 고참의 부당한 괴롭힘으로 감정이 폭발했고, 그 과정에 사망했을 수 있지만 아직은 가능성일 뿐 명백한 증언이나 증거가 부족한 상황입니다.

최온순 열사는 막내 아들이었고 온 가족의 사랑을 받았었습니다. 아버지가 특별히 아꼈는데요. 군대에서 불과 5개월 만에 주검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크게 충격을 받아 2년 뒤 1986년에 별세했습니다. 열사는 순직으로 인정되었고 국가유공자로 결정되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참고자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https://www.kdemo.or.kr/)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관 (http://yolsachumo.org/)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자료집 <끝내 살리라> (민족민주열사희생자단체연대회의, 2005,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1차 (대통령소속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3,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발간위원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2차 (대통령소속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4,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발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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