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과 우정 사이…말레이시아 영웅의 고민 [조홍석의 ‘알아두면 쓸데 있는 유쾌한 상식 이야기’]

2024. 5. 11.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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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의 반도체 산업 경쟁이 치열한데요. 이 가운데 말레이시아가 조용히 부상하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는 반도체를 검사하고 조립하는 후공정 시장의 13%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수출 규모만 보면 세계 6위고요. 최근 미국 인텔과 마이크론이 페낭에 추가로 생산공장을 건립하고 있고, 우리나라와 중국 기업들도 진출한 상태죠.

말레이시아는 개별 역사를 가진 여러 주가 연합한 연방국가입니다. 그중 싱가포르와 국경을 맞댄 조호르주는 조호르 술탄국이었는데요. 왕조 계보는 1299년 싱아푸라 왕국 건국에서 시작됐습니다. 그 후 1400년경 인도네시아 마자파힛 제국 수도 싱가포르가 함락당하자 말라카로 옮겨 말라카 술탄국으로 이어갑니다. 하지만 1511년 포르투갈 함대에 또 함락돼 다시 조호르로 옮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갖고 있죠.

특히 말라카 술탄국 시절, 해군 제독 항 투아(Hang Tuah)와 친구들 간 우정과 전쟁 이야기는 말레이시아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유명한 사연이라고 합니다.

중국계 이민자 후손인 항 투아는 항 즈밧 등 다섯 친구와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고 합니다. 이들이 해적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 말라카 술탄국 관리를 구조한 인연으로 왕실 근위대에 특별 채용됩니다. 당시 말라카는 아랍 국가들과 중국 간 중개 무역으로 크게 번성해 인도인과 중국인이 모여들었는데요. 동시에 무역선을 노린 해적도 들끓었습니다. 이에 3대 술탄 때부터 해적들을 해군으로 등용해 다른 해적을 막던 상황이었는데요.

5대 술탄 무다파 샤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된 항 투아는 진급을 거듭해 해군 사령관 직책에 오르고 인도네시아, 중국, 인도, 오스만투르크 등을 다니며 수많은 공훈을 세웠지만 위기가 찾아옵니다. 6대 술탄 만수르 미수라가 등극한 뒤, 평소 시기하던 신하들이 항 투아가 시녀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을 흘린 것이죠. 이에 격분한 술탄은 실상을 알아보지도 않고 처형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지시를 받은 재상은 마침 항 투아가 구해준 관리였는데요. 재상은 생명의 은인을 숨겨주고 처형했다고 거짓 보고합니다.

이후 항 투아의 친구, 항 즈밧이 술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왕실 근위대장으로 승격되지만 실은 친구를 죽인 술탄에게 복수하고자 칼을 갈고 있었다고 합니다. 항 즈밧은 이후 옛 친구들과 부하들을 모아 왕궁을 습격합니다.

결국 피난길에 오른 술탄에게 재상이 “실은 항 투아를 살려줬다”고 자백하자 술탄은 “용서할 테니 구해달라”고 항 투아에게 파발을 보냅니다.

서신을 받은 항 투아는 갈등합니다. 친구들이 반란군이 된 게 결국 본인 탓이니 반란군 편을 들어야 할지 술탄을 지켜야 할지 결단이 필요했던 것이죠. 결국 충성이 먼저라고 판단한 항 투아는 반란군을 처단합니다. 친구의 복수를 외치던 친구들은 허망하게도 그 친구의 칼에 죽고 맙니다. 그 후로도 충성을 다한 항 투아는 1475년 눈을 감습니다. 이에 감복한 술탄은 항 투아의 일생을 묘사한 서사시 ‘히캬아트 항 투아’를 만들어 널리 보급했고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됩니다.

현재 쿠알라룸푸르 국립역사박물관 로비에 항 투아 청동 벽화가 새겨져 있고, 해군 함정 이름으로 사용하는 등 영웅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만 과연 항 투아의 충성심과 항 즈밧의 정의 중 무엇이 옳은지 여전히 논쟁 중이라고 하네요.

현지인이 아니고선 알기 어려운 이야기죠. 우리도 처음 만난 외국인이 성웅 이순신을 안다고 말하면 감격스러운데, 말레이시아인에게 항 투아와 항 즈밧의 우정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해준다면 얼마나 좋아할까요. 말레이시아와 교류 시 이 상식이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조홍석 삼성서울병원 커뮤니케이션수석]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8호 (2024.05.08~2024.05.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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