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이냐 기만이냐... 전주영화제에서 만난 이 영화에 든 의문
[김성호 기자]
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은 영화계의 자산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가늠자다. 제작비가 적게 들고 촬영기간이 짧은 단편영화의 속성상 신예 창작자들이 제 색깔을 마음껏 펼치는 장이 되기 때문이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부문에 역대 최다인 1332편의 단편이 출품됐다는 사실은 적어도 양적으로 한국영화의 자산이 팽창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지난 수년 간 영화계에 닥쳐온 위기, 즉 정부 지원 감축이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극장 및 영화산업의 충격은 이들 신예창작자의 창작욕구를 막지 못한 듯 보인다.
▲ 분리에 대한 중요한 발견과 그에 따른 몇 가지 불안 스틸컷 |
ⓒ JIFF |
한국 단편 역대 최다 출품, 경쟁력은?
이번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부문 경쟁작으로 선정된 작품은 단 25편에 불과하다. 1332편 중 25편이니, 단순 계산해도 각 작품이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정된 것이다. 선정 과정에서 전주국제영화제의 지향이 반영됐을 건 자명하다. 영화제 측은 '영화와 창작을 둘러싼 근본적인 의제를 설정하고 나름의 답변을 마련하고자 하는 영화에 주목했다'고 나름의 잣대를 밝혔다. 즉 저만의 작가론을, 최소한 그 씨앗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을 찾고자 했다는 뜻이다. 작가라 부를 수 있는 차세대 영화인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그대로 묻어난다.
<분리에 대한 중요한 발견과 그에 따른 몇 가지 불안>은 전찬우의 20분짜리 실험영화다. 실험영화라 단정하는 것은 관객이 영화의 서사를 자연스레 따르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영화는 한 연인의 이야기 가운데 어느 모자가 등장해 지나치고 다시 연인의 이야기로 끝난다. 여자와 남자는 관계의 끝에 임박해 있는데, 한 침대에서 나누는 대화가 자못 날이 서 있다.
▲ 분리에 대한 중요한 발견과 그에 따른 몇 가지 불안 스틸컷 |
ⓒ JIFF |
이해했다 말하는 이 없는 영화, 가치는 있을까?
침대에서 일어나 또 다른 공간으로 걷는 그들. 그들이 집에 도착했을 때 처음 보는 남자아이 집 안에 앉아 TV를 고쳐달라고 말하고 있다. 여자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 아이를 내쫓으려 하고 마침내 경찰에 신고까지 한다. 어느 순간 나타난 아이 엄마는 아이와 만난다. 그렇게 그들은 떠나고 남겨진 연인은 이런 저런 별로 중요치 않게 보이는 대화를 이어간다.
흑백의 화면 위로 펼쳐진 남녀와 모자의 이야기는 기실 그것이 무엇이 중요한 지 알 수 없게 흘러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들이 뱉는 말을 뒤로 돌리고 뭉개어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알 수 없도록 한다. 도대체 무엇을 보이기 위함인지, 어떤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는 불가해함이 영화 가득 맴돈다.
▲ 분리에 대한 중요한 발견과 그에 따른 몇 가지 불안 스틸컷 |
ⓒ JIFF |
진지한 고민, 집요한 들여다봄... 그러나 실패
분명 높은 경쟁률을 뚫고 살아남은 작품이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수십 편의 작품을 떨어뜨리고서 <분리에 대한 중요한 발견과 그에 따른 몇 가지 불안>을 선정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 기회의 교차, 당과 락 사이에서 당을 따낸 이 영화의 불가해함과 자기폐쇄성 가운데 한국 단편영화의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지 한참 동안 고심했다.
나는 이 영화를 두 차례 감상했다. '한국단편경쟁 6' 가운데 자리한 이 영화를 나는 첫 대면에서 넘는 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의 가능성을 넘지 못한다 판단됐을 다른 수십 편의 영화를 위하여 나는 다시 한 번 이 영화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극장을 빠져나오며 들려오는 작품의 불친절함과 불가해함, 선정자의 의도를 알 수 없음을 비난하는 목소리들 사이로 한 명의 평자로서 이 작품의 가치를 끌어내기 위한 여러 시도를 감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모두는 철저한 실패로 돌아갔다.
▲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 JIFF |
발자크의 외침
영화가 끝난 뒤 GV 자리에서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토로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심지어는 영화의 주연배우조차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실토하였다. '상황은 상황대로, 인물은 인물대로 움직이는 것'이란 감독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한 관객이 있을까를 의심한다.
실험영화는 그것이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이상 무엇을 위한 실험인지를 적어도 증명하려 시도해야 한다. 스스로 안에 잠겨드는 자폐적 콘텐츠가 예술일 수 있는지를 되물어야 한다. 심지어 파격적이지도 독자적이지도 못한 영상은 제목 '분리에 대한 중요한 발견과 그에 따른 몇 가지 불안'에서의 '중요한 발견'이 무엇인지도 납득하게 하고 있지 못하다.
"누구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에 대해 만족을 표하지 않지. 그걸 잘 알아두라고!"
나는 이 대사보다 이와 같은 작품에 더 적합한 비평을 알지 못한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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