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연구가’ 예하가 스무 살 봄 진주에서 살기로 한 이유 #취향일지도

전혜윰 2024. 5. 11. 11: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할머니와 놀러 다니기 위해 운전을 배웠다는 손녀의 이야기.

2022년 봄, 스무 살의 예하는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요리를 배우겠다며 진주에 있는 할머니 댁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할머니의 요리 학교’의 유일한 제자로 산 지 어느덧 2년. 그동안 할머니 ‘홍순 씨’와 함께 만든 요리를 SNS로 공유하고 책 〈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를 펴냈어요. 전국 곳곳을 누비며 북토크와 강연, 요리 교실 등을 열기도 했고요. 할머니의 주름을 닮고 싶다는 요리 연구가 예하의 이야기를 만나볼까요.

Q : 엘르 독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한다면.

안녕하세요. 자칭 ‘할머니 연구가’이자 요리 연구가, 그리고 작가이기도 한 예하입니다.

Q : 지난해 〈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를 출간하면서 강연, 북토크, 인터뷰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갔죠. 요즘 근황은 어떤가요.

책이 나오고 예상치 못한 순간의 연속이었어요. 사람들이 절 만나기 위해 진주까지 찾아와준다는 게 신기했죠. 그럴수록 할 일을 스스로 찾기보다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지더라고요. 요즘은 제가 일궈내고 싶은 일,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려고 해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공간을 찾아가면서 스스로를 열심히 다듬고 있어요. 할머니의 사랑도 듬뿍 받고 있고요.

Q : 대학교 대신 ‘할머니의 요리 학교’에 입학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적극적인 지지를 해주셨다고 들었어요. 지인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대부분 대학생이 된 친구들의 얼굴엔 물음표가 가득했어요. 제 결정을 지지하면서도 ‘이게 될까…?’하는 심정이지 않았을까요. 진주로 내려온다는 건 제게도 큰 모험이었기 때문에 그 마음도 이해가 가는데요.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진주행을 선택했던 스스로에게 기특하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친구들도 지금은 저를 온전히 응원해 주고요.

Q : 유년 시절 조부모님 손에서 자랐지만 오랜만에 할머니와 생활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을까요.

많았죠.(웃음) SNS를 통해 공유하는 일상은 아름다운 부분들이고, 사실 그 외에는 되게 평범하고 잔잔하거든요. 할머니와 오래된 부부 생활을 하는 기분이에요.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사랑하지만, 한편으로 너무 편해서 저도 모르게 실수하는 일도 생기곤 해요. 예를 들면, 제가 약속을 잊어버리거나 말장난하다가 할머니가 토라지셨을 때가 있어요.

그래도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려운 점보다 눈에 들어오는 게 있는데요. 나의 기쁨과 슬픔부터 정말 소소한 부분까지 ‘이렇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사람은 할머니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Q : 진주로 이사 온 후 할머니와 가장 처음으로 간 곳은.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진주중앙시장 뒤편에 있는 새벽시장에 갔어요. 할머니 옆에 딱 붙어서 “할머니 어떤 걸 사야 해?”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시장 가서 흥정한다거나 더 담아 달라는 말을 못 하는 소심쟁이였거든요. 이제는 상인분들이 절 기억하시고 말씀드리지 않아도 반 주먹 씩 더 넣어주세요.(웃음)

Q : 마트보다는 시장을, 그 중에서도 제철 식재료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새벽 시장을 즐겨 다니는 것 같은데요. 진주의 새벽시장만이 가진 특징을 자랑해 볼까요.

새벽시장은 딱 지금만 누릴 수 있는 싱그러움이 가득한 곳이에요. 그곳에 널린 채소들은 마냥 예쁘게 생기지 않았어요. 전혀 가지처럼 생기지 않은 생김새를 보고 “이게 가지야?”라며 놀란 적도 있죠. 포장도 신문지 위나 ‘빨간 다라이’ 안에 널브러져 있는데 그 자연스러움에 반하게 돼요. 사람이 늘 자연스러울 수는 없잖아요. 평소에 나를 포장할 일이 많은데 여기선 모든 게 자연스러워서 편안함을 느껴요.

Q : 〈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에는 호박꽃전, 키위 장아찌 등 처음 보는 독특한 음식이 소개돼요. 최근 발견한 식재료나 음식이 있나요.

초반에는 새로운 음식이나 식재료에 많이 집중했는데, 요즘은 기존에 알고 있던 식재료의 새로운 매력을 파헤치고 있어요. 어떤 재료든 새로운 방식으로 조리하거나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면 매력이 끝이 없거든요.

최근에는 생고사리에 빠졌는데요. 건고사리만큼 향이 진하진 않지만 오독오독하고 끈적한 식감이 마음에 들어요. 꼬불거리는 모양도 너무 귀엽고요. 집앞 언덕에서 따온 고사리로 장아찌도 만들고 국도 끓여보고 전도 부치면서 여러 메뉴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Q : 진주에 내려온 계기는 할머니의 요리 학교였지만 점점 이 도시의 매력에도 푹 빠졌다고요. 한 강연에서는 진주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공유 주방, 게스트 하우스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는데 그 목표는 변함이 없나요.

네! 요즘 새로운 사람과 공간을 찾아다닌다고 했는데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준비 과정이에요. 저와 결이 비슷한, 스스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은근히 지역 곳곳에 숨어 계시더라고요.

최근에는 논산 꽃비원에 다녀왔는데요. 꽃비 내리는 과수원이라는 뜻을 가진 이곳은 농장에서 키운 재료로 식당을 열고, 스테이도 운영해요. 온 가족이 함께 농사도 짓고요. 제가 꿈꾸는 공간과 비슷한 곳이라 보면서 가슴 뛰는 경험을 했어요.

Q : 블로그에도 가끔 진주의 숨은 공간들을 소개하죠. 엘르 독자들에게 추천할 만한 곳이 있다면?

진주 생활에 빛이 되어준 와인바 겸 비스트로 ‘니도’를 소개하고 싶어요. 건강한 땅에서 자라난 싱그러운 재료의 힘을 아는 셰프님이 운영하는 곳인데요. 단골손님 입맛에 맞춰 청양고추를 따로 준비해 두거나 메뉴판에 없는 메뉴도 휘리릭 만들어 주세요. 아이들을 위해 남몰래 도시락 봉사도 하시고요. 누구든 집처럼 편히 앉아 있다 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서 둥지라는 뜻의 ‘니도’라고 이름 붙이셨대요. 아담한 공간이라 예약하고 방문하는 걸 추천합니다.

Q : 할머니와 어디든 갈 수 있다면 함께 가보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요.

질문을 받고 할머니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해봤는데요. 어릴 적 할머니와 자주 놀러 다녔던 지리산에 가고 싶어요. 캠핑 도구를 잔뜩 챙겨서 계곡 근처에 텐트를 치고 라면 끓여 먹던 기억이 선명해요. 사실 진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 할머니께서 체력이 예전 같지 않으시다 보니 이제는 쉽게 갈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몇 달 전에 면허를 땄어요. 올여름엔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Q : 〈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 마지막 부분에 손녀에게 남긴 할머니의 편지가 인상적이에요. 인터뷰를 빌려 할머니께 답장을 남겨본다면.

할머니, 사람들이 저에게 어떤 음식을 만들고 싶냐고 물으면 편안한 음식을 만들고 싶다고 답해요. 왜냐하면 제게 편안함은 가장 큰 사랑이기도 하거든요. 새로운 설렘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걸 할머니와 살면서 배웠어요. 올여름엔 지리산에도 가고 세월 가는 줄 모르게 놀러 갑시다. 잘 부탁해 할머니!

Q : 요리 연구가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요리 이전에 땅이 있고, 농부님들의 이야기가 있잖아요. 토종 종자나 우리 땅에서 자라는 ‘우리의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요. 익숙하고 흔할수록 귀하다고 생각해서 하찮은 쓸모에 대해서 나누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Q : 홍순 씨의 제자로서 할머니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싶나요.

미래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순간에 집중하면서 사는 게 좀 더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그냥 홍순 씨와 지금처럼 지내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지금처럼만요!

Copyright © 엘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