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탈북민 강제북송' 먼저 때린 美…부담 커진 尹정부
정 박 "중국, 탈북민 강제북송 하지 말라"
전문가 "尹정부 가치 외교, 노골적 탈선"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수백명 규모의 재중 탈북민이 북송됐지만, 정부는 말을 아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먼저 중국에 강제북송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면서, '6년 만의 방중'을 앞둔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이 사안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을지 주목된다. 한·중·일 정상회의를 비롯한 관계 개선까지 동시에 풀어내야 하는 만큼 쉽지 않은 과제다.
미 국무부에 따르면 정 박 국무부 대북고위관리는 9일(현지시간) 일본 도쿄에서 열린 동북아협력대화(NEACD)를 계기로 류사오밍 중국 한반도사무특별대표와 만나 북한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 따른 안보 위협을 우려하는 한편, 특히 중국이 '망명 신청자'를 비롯한 탈북민을 강제북송 한 문제를 지적했다.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자 ▲난민지위협약 ▲고문방지협약 등 국제법상 원칙의 '당사국'으로, 탈북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상기한 것이다.
'강제북송' 입 다문 한국…中 잘못 지적한 미국
앞서 중국은 지난해 10월 항저우 아시안게임 폐막 직후 탈북민 약 500명을 대거 북송했다. 이후로도 북송 작업은 지속됐고, 지난달 26일에는 지린성 바이산(백산) 구류소 등에 수용돼 있던 탈북민 200명이 추가 송환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우려가 커졌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도 지난 8일 중국 정부가 최근 약 60명의 탈북민을 북송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는 북한 주민들이 북송 이후 처하는 인권 유린 때문이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탈북민이 북송될 경우 정치범 수용소에서의 강제노역과 자의적 구금, 고문, 성폭행, 심지어는 처형당할 위험에 노출된다고 여러 차례 경고했다.
우리 정부는 '최근 다수의 탈북민이 북한으로 보내진 게 맞다'고 확인하면서도, 대응에 있어서는 원론적인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소관 부처인 외교부와 통일부는 "정부는 어떤 경우에도 해외 체류 탈북민이 자유의사에 반해 강제송환 돼선 안 된다는 입장"이라는 방침만 밝혔을 뿐 중국 측과 이 문제로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 지난해 대규모 북송 당시에는 '엄중히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했지만, 이번에는 별도의 유감 표명도 하지 않았다.
미국이 먼저 강제북송 문제를 지적하고 나선 이날 도쿄에선 한·미·일 대북협상대표 간 회동도 이뤄졌다. 이준일 외교부 북핵외교기획단장과 정 박 대북고위관리, 나마즈 히로유키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은 북한의 도발과 불법 대량살상무기(WMD), 탄도미사일 프로그램, 북·러 군사 협력 심화 등에 대한 우려를 나눴다. 한국이 최우선 당사국인 대북 사안을 논의하고자 우방국이 모인 상황에서도 한국이 아닌 미국이 탈북민 북송 문제에 목소리를 낸 셈이다.
'가치 외교' 한다더니…탈북민 인권에는 '침묵'
정부는 그간 '조용한 외교(quiet diplomacy)' 기조를 지켜왔다. 공개적 언급으로 충돌이 빚어지는 상황을 피하되, 물밑에서 실효성 있는 결과를 만들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런 방침은 지난해 1차 대규모 북송 당시 한계를 드러냈다는 게 북한인권단체들의 평가다. 더욱이 윤석열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인권 등 보편적 가치를 앞세우는 '가치 외교'를 기치로 내걸었다. 그런데도 황준국 주유엔대사는 지난해 10월 유엔 총회에서 한국 정부의 입장을 밝히면서 "제3국에 억류돼 있던 북한 사람들이 강제송환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말해 비판을 자초하기도 했다. 중국을 '중국'이라 지적하지 못하고 '제3국'이라 돌려 말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말을 아끼는 배경에는 지난해부터 의장국으로서 공을 들여온 한·중·일 정상회의가 있다. 이달 26~27일 개최를 목표로 조율 중이다. 오는 13~14일 베이징을 찾는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이 사안을 매듭짓고 올 것으로 보인다.
한국 외교부 장관으로선 2017년 11월 이후 6년 반 만에 방중하는 조 장관은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한중 외교장관 회담을 갖고, 북한에 대한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당부할 예정이다. 탈북민 강제북송 문제도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조 장관이 윤석열 정부의 외교 사령탑으로서 '가치 외교'에 걸맞은 요구를 꺼낼지는 미지수다. 한중관계 개선과 고위급 교류 재개, 공급망 재편 등 중국을 우호적인 자세로 유인하거나 달래야 하는 과제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이 외교적 악재로 작용할 만한 '높은 수위'로 항의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중국의 계산이 깔린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조태열 장관, 회담 의제로 강제북송 포함해야"
북한인권단체들은 지난 9일 외교부 청사 앞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조 장관을 향해 '탈북 난민에 대한 강제송환 금지 및 한국행 보장'을 한중 외교장관 회담 의제로 포함할 것을 요구했다. 윤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탈북민 강제북송에 대해 '심각한 인권 유린'이라고 비판했던 말을 지켜야 한다는 점도 꼬집었다. 북한인권시민연합(NKHR)·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북한정의연대(JFNK)·물망초·국군포로가족회 등 단체들과 강제송환 피해자 가족 김규리씨, 김혁씨도 함께했다.
이영환 전환기정의워킹그룹 대표는 "러시아의 거부권으로 안보리 대북제재 전문가 패널이 종료된 상황에서 서방 국가들이 불참을 선언한 푸틴의 취임식에 대사를 보낸 것부터 '가치 외교'를 저버린 노골적 탈선"이라며 "한국이 글로벌 중추 국가로 올라서겠다고 한 데 대한 국제사회의 기대를 정면으로 깎아내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태열 장관은 이번 방중에서 강제북송 문제를 포함, 중국으로부터 어떤 것을 얻고 어떤 것을 내줬는지 국민들이 알게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성묵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은 "(조태열 장관은) 중국이 난민 협약 가입국인데도 탈북민을 '불법 입국자'로 간주하고 강제로 북송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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