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마 코어가 뭔데?

손다예 2024. 5. 9.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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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할아버지처럼. 세대를 초월한 그래니 룩의 반전 매력.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에 맞서 ‘안티에이징’을 외치며 온몸으로 노화를 피하려 하지만, 애석하게도 거부할 수 없는 노화와 함께 점점 노인 이 돼가는 건 만개한 꽃이 때가 되면 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섭리다. “너희의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던 영화 〈은교〉의 명대사처럼 눈부시게 만개했던 젊음의 전성기를 지나 담담하게 낙화를 받아들이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며 종종 아득했던 내 늙음이 그다지 머지않았음을 느끼곤 한다.

컬러플하고 빈티지 스타일을 즐기는 블랑카 미로.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힘든 것은 물론이거니와 솔직히 고백하자면 대부분의 이들이 노인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미래를 순수하게 긍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름진 얼굴과 기력이 쇠한 몸, 청년시절만큼 빛나는 호기심과 열정이 퇴색된 마음과 함께 남은 세월을 묵묵히 보내는 자화상을 떠올리는 건 대체로 무섭고 두려우며 울적한 일일 테니. 게다가 어떤 업계보다 젊고 새로우며 참신한 이야기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패션계에서 노년층의 존재감이란 매우 빈약할 수밖에 없다.

런더너의 빈티지 무드가 담긴 알렉사 청의 룩.
그래니 시크를 이끈 미우미우 컬렉션.
인생에서 가장 싱그러운 아름다움으로 빛날 10대 후반~20대 초반의 화려한 모델들이 장관을 이루듯 끝도 없이 등장하는 런웨이, 그들이 선보인 새 시즌 유행을 마음껏 즐기는 젊은 세대의 풋풋한 일상에서 주름진 노인의 얼굴을 찾기란 무척 힘든 일이니까.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지난 2015년, 당시 지금보다 훨씬 어렸기에 더욱 노년의 삶에 무지했던 내게도 마음의 파장을 불러일으킨 사진이 있었으니 바로 피비 파일로가 셀린느를 이끌었던, 이른바 ‘올드 셀린느’ 시절 광고 캠페인에 등장한 작가 조앤 디디온의 모습이었다. 미국 뉴 저널리즘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당시 스타일 아이콘으로 유명했던 조앤 디디온이 어느새 할머니가 된 백발의 모습으로 피비 파일로와 유르겐 텔러의 뮤즈로 등장했다.
jw anderson
chanel
molly goddard
loewe
miu miu
loewe
언제나 남다른 선택으로 놀람을 안기는 피비 파일로는 급변하는 트렌드에 맞서며 ‘할머니’ 사진을 통해 변치 않는 아름다움, 기본에 충실한 스타일 미학을 어떤 마케팅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었다. 당시 20대였던 내게도 할머니 아이콘이 전하는 패셔너블한 메시지의 힘이 이토록 강력하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또 돌체앤가바나 캠페인에 이탈리아 할머니들이 톱 모델 대신 등장하거나 해외에서는 아이리스 아펠, 국내에서는 윤여정과 밀라논나 등 나이에 굴복하지 않는 독보적인 패션 스타일을 선보이는 할머니 아이콘의 활약이 젊은 세대의 지지를 얻으며 패션계에 참신한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erdem
molly goddard
그리고 2024년 현재, 그들의 담대한 도전을 바라보기만 했던 과거와는 달리 흥미롭게도 ‘요즘 세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스타일이 떠오르는 빈티지 패션을 몸소 착용하길 즐긴다. 동묘시장에서 ‘득템’했나 싶은 빈티지 재킷에 화려한 패턴의 니트 헤드피스나 실크 스카프를 매치하고 둔탁한 슈즈를 신는 벨라 하디드, 2001년에 태어났으나 누구보다 그래니 시크(Granny Chic)를 애정하며 빛바랜 컬러의 셔츠와 미디스커트, 에이프런 등을 즐겨 매치하는 틱톡커 앰마 챔벌린과 자유분방한 런던 할머니 룩을 위트 넘치게 스타일링하는 엠마 코린 등…. 크고 편안한 실루엣, 빈티지한 패턴과 색감, 두툼한 니트나 스웨이드 소재 등 할머니 옷장이 단번에 떠오르는 그랜마 코어는 이제 노년층의 전유물이 아닌, 요즘 세대의 새로운 트렌드이자 즐길 거리로 사랑받으며 각종 숏폼에서도 관련 영상이 엄청난 조회 수를 기록 중이다. 지난해까지는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우아한 올드 머니 룩이 대세였지만 이제는 넉넉한 사이즈의 벌키하고 컬러플한 니트, 배꼽까지 끌어올린 우스꽝스러운 하이웨이스트 코듀로이 팬츠, 트위드 미디스커트와 빈티지 안경이 트렌드로 급부상했으며 그 기저에는 새로운 트렌드를 꾸준하게 양산하는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가 번뜩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빛바랜 듯한 색감, 화려한 꽃무늬를 비즈로 섬세하게 장식했지만 왠지 모르게 허름(!)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커다란 빅 백을 옆구리에 낀 채 빈티지 안경을 쓴 미우미우의 모델들은 우리 기억 속 멋쟁이 할머니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래니 스타일을 즐기는 에밀리 신레브.
유니크한 그래니 룩을 애정하는 엠마 코린.
빈티지 헤드 스카프를 쓴 벨라 하디드.
지지 하디드의 그래니 룩.
대충 걸쳐 입은 듯하지만 옷장 속 빈티지 아이템을 능수능란하게 스타일링한 모습은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고수하는 근사한 그래니 룩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가 하면 조너선 앤더슨은 아예 구불구불한 백발의 할머니 가발을 쓴 채 커다란 실루엣의 옷을 걸친 스타일리시한 모델을 런웨이에 대거 등장시켰고, 로에베 쇼에 오른 남여 모델 모두에게 배꼽 끝까지 끌어올린 빈티지 소재의 하이웨이스트 팬츠를 선보여 힘껏 바지를 올려 입은 우리네 할아버지들의 옷차림을 떠올리게 했다. 붉은 벽돌이 깔린 런던의 오래된 동네를 산책하는 듯한 몰리 고다드의 사랑스러운 그래니 룩, 빈티지 식탁보처럼 서정적인 꽃무늬가 잔뜩 그려진 누빔 재킷이 등장한 에르뎀 쇼 역시 이번 시즌 반갑게 귀환한 그랜마 코어 트렌드에 힘을 보탠다. “우리가 옷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즐기는지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콰이어트 럭셔리(Quiet Luxury)와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래니 시크에 의도적으로 집중했냐는 질문에 조너선 앤더슨이 전한 답변이 이런 흐름을 영민하게 대변한다. 비로소 세대와 트렌드를 초월해 올타임 클래식으로 거듭난 그랜마 코어의 활약은 세대의 견고한 벽을 허물고 패션으로 위트 있게 소통한다는 점에서 더욱 시선을 끈다. 덕분에 나이듦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감이 조금 해소되는 기분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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