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북·러 짬짜미로 사라진 대북 감시의 눈

정용수 2024. 5. 9.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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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논설위원

영국 BBC방송은 지난 5일 국제 군사전문가들을 인용해 “북한이 러시아에 공급한 미사일에 장착된 핵심 전자부품 대부분이 지난 수년간 미국과 유럽에서 제조된 제품”이라고 보도했다. BBC는 “2023년 3월에 제조된 미국산 반도체 칩도 북한 미사일에 사용됐다”라고도 했다. 러시아가 지난 1월 우크라이나의 제2 도시 하르키우를 공격한 미사일 잔해에서 발견된 제품을 분석한 결과라고 한다. 이 미사일을 조사한 분쟁무기리서치(Conflict Armament Research·CAR)의 부대표 데미안 스플리터스는 “20년 동안의 가혹한 경제제재에도 북한은 무기 제조에 필요한 모든 제품을 손에 넣었으며 매우 신속한 속도로 제조했다”고 BBC에 전했다.

「 지난달 대북 전문가 패널 종료
중은 대북 밀거래 눈치껏 묵인
러는 대북제재 허물어 북 돕기
영원한 벗 없다는 점 직시해야

북, 국가 차원의 조직적인 밀반입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가운데)이 지난달 16일 열린 평양 화성지구 2단계 살림집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승용차에서 내리고 있다. 이 차량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월 김 위원장에게 선물한 러시아산 최고급 승용차인 아우르스다. [연합뉴스]

정보 당국이 파악하고 있는 북한의 대표적인 밀거래 사례를 통해 북한이 촘촘한 대북제재망을 뚫는 방법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지난 2007년 2월 초 북한 고위 인사 한 명이 중국 베이징 공항의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려다 중국 당국에 체포됐다. 어정쩡하게 걸어가는 이 인사의 걸음걸이를 수상하게 여긴 검색대 직원이 불러세워 조사한 결과 그의 몸에서 10만 달러의 현금 뭉치가 나왔다. 당시 중국에서 신고하지 않고 반출할 수 있는 외환 한도가 5000달러였지만 이 인사는 10만 달러를 랩과 테이프를 이용해 몸에 칭칭 감은 상태였다. 정보 당국은 김정일의 생일(2월 16일)을 앞두고 충성자금을 불법으로 가져가려다 적발된 것으로 파악했다. 은행 거래가 막혀 있는 북한은 거액의 달러나 중국 위안화 뭉치를 화물차의 핸들 경음기 안쪽에 숨기는 등, 마약을 운반하듯 조직적이고 은밀하게 ‘배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유형의 불법 외환 운반은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게 당국의 판단이다.

북·중 교역의 관문인 중국 단둥의 세관 야적장에선 중국 세관원들의 묵인 속에 밀수가 다반사다. 통상 세관의 통관 검사는 국경을 넘기 직전 실시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단둥에선 시내 야적장에서 진행한다. 검사원들이 서류만 형식적으로 확인하거나 검사를 마친 뒤 화물차 밀봉(실링)을 하지 않는다. 야적장을 드나드는 차량이나 인원에 대한 검색도 허술하다. 그렇다 보니 ‘업자’들은 이를 악용한다. 욕실 수리용 타일 등 제재에 걸리지 않는 품목으로 탑형 화물차의 절반만 채운 뒤 검사를 마치면 밀수용 물품을 실은 다른 트럭이 다가와 나머지 빈칸을 채우는 식이다. 밀수 금지 품목인 승용차를 컨테이너 앞쪽에 싣고 그 뒤에 밀가루 포대 등을 쌓아 감추는 경우도 있다.

작은 물품은 빈 협약에 따라 내용물을 확인할 수 없도록 한 외교행낭을 활용하기도 한다. 또 고가(高價)의 사치품 등 사람이 직접 운반해야 하는 경우는 베이징과 평양을 오가는 항공기나 기차의 승무원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베이징의 공항과 국제열차역에 근무하는 북한 관계자들이 검색대를 피해 몰래 물건을 들고 들어가 항공기 기장이나 차장에게 전달하고, 이들이 북한 내부로 옮기는 식이다. 이런 물품들은 국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반입에 나서는 만큼 중국의 ‘저지선’만 뚫는다면 북한 내부에선 누구도 문제 삼을 수 없는 것이다.

북한의 새로운 산소호흡기 러시아

중국이 단속과 묵인을 반복하며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는 것과 달리 러시아의 구멍은 훨씬 과감하고 노골적이다.

특히 최근 들어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에 따른 거래는 품목이나 규모에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비웃는 모습이다. 지난 2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자신의 전용차와 같은 종류의 고급 승용차(아우르스)를 김 위원장에게 선물한 게 대표적이다. 승용차는 대북거래 금지품목이다. 그럼에도 북한과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의 승용차 선물 소식을 관영 매체를 통해 공개했다. 북한은 김 위원장이 이 차량을 이용하는 사진과 동영상을 내보냈고, 그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감사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서방에서 잘못된 만남으로 규정했던 지난해 9월 북중 정상회담을 전후한 시점부터 북한산 미사일과 포탄이 러시아로 향했고, 여기엔 대형 화물선도 동원됐다. 북한산 미사일과 포탄은 우크라이나 공격에 활용 중이고, 양측의 밀착은 교육·문화·산림 등까지 전방위적이다. 특히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는 대북제재 이행을 감시하는 유엔 전문가 패널의 활동 연장에 반대표를 던져 지난달 말로 대북 감시의 눈도 없애 버렸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막기 위해 자신들이 찬성한 대북제재를 대놓고 허물려는 의도인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러시아는 원유를 북한으로 운반할 유조선을 공개 모집하는 과감함도 보인다. 북한은 최근 대외 활동 거점을 중국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기고, 북러 국경 두만강역에 대형 야적장을 건설하는 공사를 마쳤다. 조만간 열차를 이용한 무기 거래나 러시아의 대북 지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2018년 이후 약 2년 동안 중국에 치중했던 정책이 러시아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1990년대 대기근을 겪은 고난의 행군 이후 한국에 손을 뻗었다. 당시 남북 회담에 나온 북한 당국자들의 소임은 쌀과 비료 지원 약속이었다. 한국을 산소호흡기로 삼았던 셈이다. 남북관계가 냉각되면 중국을 찾는 모습도 보였다. 한국→중국→러시아로 그때그때 방향이 바뀌는 것이다.

북러 양측은 새로운 협력 관계라고 의미 부여한다. 하지만 최근 움직임은 국제사회에서 든든한 뒷배와 경제 정상화를 위한 호흡기가 필요했던 북한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사용할 무기가 필요했던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선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 1960년대 중소 분쟁 당시 때론 중국 편에, 때론 소련 편에 섰던 북한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아가 잘못된 거래가 산소호흡기는 될지언정,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근본적 타개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도 말이다.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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