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속편의 시대, '마의 4편' 법칙 깬 '혹성탈출'
[최해린 기자]
* 이 글에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혹성탈출> 프랜차이즈가 돌아왔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1968년 영화 <혹성탈출>로 시작된 일련의 영화 시리즈는, 21세기 들어 한 번의 '리부트'를 겪으면서 2011년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으로 우리 곁에 다시 자리 잡아 2017년까지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그리고 <혹성탈출: 종의 전쟁> 삼부작을 만들어 명작으로 인정받은 바 있다.
▲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공식 포스터 |
ⓒ 20세기 스튜디오 |
전작은 예우하되, 새 출발은 과감하게
할리우드에서 4편은 항상 '마의 숫자'다. 시리즈 영화 제작자들은 대게 3편까지의 트릴로지(trilogy) 구성을 염두에 두고 제작하며, 그 이후의 이야기는 투자자들의 요구 등이 원인이 되어 반강제적으로 탄생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워쇼스키 자매의 <매트릭스> 시리즈는 현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삼부작이었지만, 2021년 돌아온 4번째 영화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작품성과 흥행 모두 미미한 평가에 머물러 빠르게 잊혀진 바 있다. 기존 시리즈의 주인공들을 되돌리고 감독 라나 워쇼스키까지 전격 복귀했지만, 비슷한 스토리 구성에 실망한 관객들은 이를 외면했다.
마이클 베이 감독의 <트랜스포머> 시리즈는 4편에서 인간 주인공을 교체하고, 로봇 주인공들의 디자인은 과감하게 수정하는 등 '익숙한 것을 새롭게' 바꾸는 전략을 취했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가 5번째 영화인 <트랜스포머: 라스트 나이트>이후로 6편이 제작 취소된 바 있다. 이처럼 할리우드의 네 번째 영화는 헛디디기 쉬운 네 번째 계단이다.
하지만,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트랜스포머> 시리즈보다도 과감한 전략을 취했다. 기존 삼부작의 시점에서부터 삼백 년이 지난 시간대를 작중 시대로 삼은 만큼, 주인공을 모두 교체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본작의 유인원 주인공 '노아'는 악당 '프록시무스'가 이끄는 군대에 마을을 잃은 후, 납치된 동료들을 찾기 위해 프록시무스를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말하는 인간 '메이'를 만나고, 역사에 능통한 오랑우탄 '라카'와 조우하는 등 '구시대의 인물'들과 만나며 유인원과 인간이 공존하던 시절에 대해 배운다.
시리즈가 재시작되지 않고 엄연한 속편이 된 만큼, 노아의 길에는 전 삼부작의 주인공 '시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그가 배우는 역사는 바이러스로 인해 똑똑해지던 유인원들과 퇴화하던 인간이 공존하던 시저 시절의 이야기 그 자체다. 하지만 영화는 관객들이 전 삼부작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고도 시저가 어떤 존재인지 명확히 떠올릴 수 있도록 작중 인물들의 입을 통해 친절하게 설명한다. 기존 삼부작을 보면 이해가 더 깊어질 수는 있지만, 그러지 않아도 본작을 즐길 수 있도록 과감한 도약을 이룬 것이다. 마블 스튜디오의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같은 작품이 전작의 스토리라인에 과하게 의존하여 비판받아 온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새 영화니만큼, 주제도 새롭게
기존 <혹성탈출> 시리즈는 이기적인 인간들과 현명한 유인원 시저의 대조를 통해 인간다움에 대한 메시지를 던졌다. 특히 마지막 작품인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서는 시저가 지능을 잃은 인간 '노바'를 도맡아 보호하면서 다른 종족에 대한 자비심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관객의 감동을 자아낸 바 있다.
하지만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기존 시리즈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간 주제 의식을 선보인다. 작중의 인간 주인공 '메이'는 독재자 유인원 프록시무스에 맞서는 노아 일행을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프록시무스가 지키던 인간의 '위성 통신 장치'를 지키기 위해 계획적으로 접근한 거였다.
"그럼 우리더러 다시 침묵당하던 시절로 돌아가란 소리야?"
이미 유인원들이 오랫동안 문명을 이룬 본작의 시대상을 지적하는 대사이지만, 동시에 이미 다룬 주제 의식을 똑같이 복제할 생각은 없다는 제작진의 의지를 표명한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공식 스틸컷 |
ⓒ 20세기 스튜디오 |
"우린 그의 말에 따라야 하지. 그게 법이야. 하지만 법은 틀렸어."
프록시무스에 맞서 반기를 들기로 결정한 노아는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게 법이야"라는 표현에 위와 같이 말을 덧붙인다. 노아의 이러한 성장 과정은 무력을 위시한 파시즘에 당당하게 맞서는 시민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존 삼부작이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풀어놓았다면,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이미 세상의 주류로 우뚝 선 유인원들이 '어떻게 인간성을 상실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속편의 시대,' 거듭해서 변혁 시도하는 수밖에
바야흐로 '속편의 시대'다. 눈만 감았다 떠도 기존 IP에 대한 리메이크·리부트·외전 제작 소식이 들려온다. 새로운 이야기들을 경시하고 '흥행이 보장된' 기존의 프랜차이즈로만 관성적으로 회귀하는 할리우드의 제작 시스템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극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시민들의 미디어 소비도 다원화된 이 시대에 '속편 열풍'을 충고 몇 마디로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전작의 특장점을 계승하되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가 반가운 이유다.
웨스 볼 감독의 비주얼은 비교적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해할 틈을 주지 않았고, 노아와 메이를 비롯한 새로운 인물들은 금세 관객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날씨가 후텁지근해지기 시작하는 5월, 신선한 블록버스터로 더위를 씻어내고 싶다면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를 감상해 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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