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산책]70년 만에 처음 함께하는 남매 작가의 전시
39년생 누나, 47년생 동생…반세기만의 조우
윤석남의 드로잉과 윤석구의 설치 작업 한자리에
반세기 넘게 작품활동을 이어온 두 남매가 처음으로 함께하는 전시가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린다.
3남 4녀 가운데 1939년생 둘째인 윤석남 작가와 1947년생 여섯째인 윤석구 작가는 각각 회화와 설치작품을 통해 여성과 현대적 진혼의 메시지를 대중에 전해왔다. 학고재 기획전 ‘뉴 라이프’에서 윤석남은 해방 전 혼돈의 시대, 만주에서 태어나 온갖 역경을 겪고 극복해 여성으로 사는 삶의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표현한 미술을 선보였다. 윤석구는 인간과 대상(세계)이 화해하는 방법을 모색해 왔다. 속박된 일상 사물의 구휼(救恤), 그것이 윤석구가 가는 길이다.
두 작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진혼가(鎭魂歌)가 흐른다. 두 작가의 작품은 진혼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전시에서 윤석남이 천착해 온 여성주의 예술의 진가는 배가되고 윤석구의 ‘레디메이드’ 혹은 ‘발견된 사물(found object)’의 의미는 증폭된다.
갤러리 입구에서부터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남성이 관람객을 맞는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인체 비례 드로잉을 본떠 만든 것으로, 알록달록한 천으로 둘러싸여 있다. 작가는 인체 비례라는 진지한 작품에 화려한 천을 씌워 다빈치에서 비롯된 과학만능주의에 비판적 시선을 보낸다. 그는 이 작품에서 무엇이든 과학을 통해 가능하다는 세태를 비판한다.
전시장 중간에는 빌렌드로프의 비너스 조각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화려한 컬러와 문양의 천들을 덮어쓴 조각상은 지치고 피곤한 기색조차 일상에서 드러내지 못하는 현대인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버려진 나무를 주워다가 천으로 감싸는 작품을 선보여온 윤석구는 이 작업을 통해 나무에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그는 나무에 이어 아파트에서 버려진 물건을 가져다 천으로 감싸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의자에, 어느 날은 탁자에 천을 감쌌다. 이번 전시 주제가 '뉴 라이프'인 까닭은 이처럼 그가 하마터면 죽어 사라질 뻔한 사물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 것에 기인한 것일지 모른다.
갤러리 안쪽에는 윤석남 작가의 회화 작품이 가득하다. 그는 작품 속에 편지인지 또는 시인지 모를 글을 적어뒀다. 그는 작품 속에 글을 적으며 서사를 부여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두 작가의 부친은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 감독이자 한국 최초 대중소설 '대도전'의 작가 윤백남이다.
팔십 중반의 윤석남 작가에게 책 읽기는 여전히 그림 그리기와 더불어 몸에 익은 습관처럼 빼놓지 않고 행하는 일과다. 그는 여러 단계의 복잡한 제작 과정과 함축적 서사를 담은 입체 작업과 비교해, 자발적으로 떠오르는 이야기나 형상을 단시간에 즉흥적으로 그리고 거기에 글귀를 써넣은 드로잉을 통해 새로운 형식의 작업 형태를 완성해 나간다.
이는 언뜻 그림일기를 연상시키는데, 이는 여성으로서 자전적 경험과 생각들, 친밀한 인간관계에 대한 단상들, 문학에서 떠오른 영감 등 시간과 공간이 자유롭게 교차하며 자발적으로 흘러나온 시적 성격이 강한 작업이다. 유머와 재치가 넘치고 공감과 상상력을 자극하면서도 직관적인 독해가 가능한 작가의 드로잉은 묵직한 현실 문제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 있다.
반면 윤석남의 드로잉은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내는 작업이다. 그는 소재 고갈의 벽을 마주한 뒤 자연스럽게 시작한 드로잉 작업에 2년 동안 매달렸다고 한다. 그는 이 시간을 온전히 드로잉에만 쏟아부으며 치유받았다고 고백한다. 이 기간에 그가 작업한 작품 중에는 유독 그네에 매달린 인물을 묘사한 듯한 작품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작가는 드로잉 작업 당시 ‘지상에서 딱 20㎝만 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높이가 20㎝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서로 다른 삶의 궤적과 예술적 지향점을 갖고 걸어가는 두 사람이지만, 두 작가는 자본주의를 성찰하고, 동시에 인간과 자연을 돌보고 보듬으며 살피는 시선과 태도 면에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미술사학자 김현주는 이를 두고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살리는' 예술"이라고 규정했다. 전시는 쉽고도 친절한 작품 속 두 남매가 켜켜이 쌓아온 묵직한 메시지를 전한다. 전시는 25일까지.
두 작가는 쉬운 작품 속에 묵직한 메시지를 담았다. 남매의 전시는 25일까지 이어진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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