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교수 "지옥같은 사회 벗어나려면 '숙론' 필요"

박병희 2024. 5. 8.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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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자 최재천 교수 새책 '숙론' 출간
"숙론은 상대 배려하고 존중하는 토론"
"한국의 숙론 문화 일제시대 때 사라져"
"토론 못하는 의원들 '숙론' 선물하고파"

"토론할 때 '토(討)'자가 두들길 토 자다. 그러니까 토론하라 그러면 서로 두들겨 패고 말다툼하느라 토론을 못하는 것 같아서 토론과는 다른 느낌이었으면 했다. 상대를 어떻게든 제압하려고 덤벼드는 태도를 자제하고, 상대의 얘기에 귀 기울이고 생각하면서 얘기하고 합의를 도출하면 좋겠다 싶어서 '숙론'을 생각했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는 7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숙론(김영사)'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토론이 아닌 숙론을 화두로 꺼낸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토론으로서 숙론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한국 사회의 심각한 분열을 끝내기 위해서는 토론이 아닌 숙론이 필요하다며 숙론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찾는 과정이라고 역설했다.

최 교수는 광화문에 촛불 든 시위대가 있고,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시청 앞에 태극기를 든 시위대가 있는 상황을 언급하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갈등이 한꺼번에 다 쏟아져 나와 있는 곳이 우리 사회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터넷 공간에 배설하기 전에, 거리로 뛰쳐나가기 전에 점잖게 둘러앉아 얘기하고, 나랑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지옥 같은 사회에 살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가 7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숙론(김영사)'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 제공= 김영사]

최 교수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상대 의견을 존중하는 문화를 찾기 쉽지 않지만 우리 조상들에게는 숙론의 문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원효 대사의 화쟁 사상과 조선 시대 왕과 신하의 경연을 그 예로 들었다. 다만 최 교수는 우리가 일제 시대 때 숙론의 전통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이 우리를 식민 통치하기 위해 획일적인 사상을 주입하고 지식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교육을 하면서 숙론의 전통이 사라졌다"고 했다.

최 교수는 일본이 학문적으로 굉장히 앞선 나라지만 지금도 일본 대학에서는 제대로 된 토론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다. 일본의 대학으로 유학간 제자들이 제대로 된 토론을 하지 않아 수업이 재미가 없다고 토로했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토론이 이뤄지지 않아 수업이 재미가 없다는 생각은 최 교수가 한국에서 강의를 할 때도 느낀 감정이었다.

생태학자이자 동물행동학자인 최재천 교수는 서울대에서 동물학을 전공하고 1980년대 하버드대에서 공부하며 동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하버드에서 수업 조교를 하며 학생 중심의 토론 수업을 체득했다. 1994년 서울대 교수로 부임한 뒤 토론 중심의 수업을 계속 했다. 하지만 최 교수는 "솔직히 얘기하면 한 번도 재미가 없었다"며 "한국에서는 토론 수업을 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적극적인 의견 개진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토론 수업을 재미있게 해본 곳은 하버드대 한 곳뿐이었다고 했다. "하버드에서는 토론 수업을 이끌려면 '더러운 양말(dirty socks)' 하나를 가지고 수업에 들어가라는 말이 있다. 한두 명 학생이 지나치게 토론을 장악하는 것을 막으려면 양말로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버드 학생들은 토론하기를 너무 좋아한다. 다른 아이비리그의 예일대 등과 비교해도 차이가 많이 난다. 하버드는 말 잘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그래서 하버드 출신 중 말 못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최 교수는 "교육이 제대로 되려면 토론 수업이 제대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다"며 이러한 신념이 '숙론'을 쓴 계기가 됐다고 했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가 7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숙론(김영사)'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 제공= 김영사]

최 교수는 상대 의견을 존중하는 문화를 잃어버린 때가 일제 시대라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금방 그 문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그래서 현재 우리 사회를 세기말의 (오스트리아) 빈에 비유하기도 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세기말 빈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가끔 한다.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이 망해가고 있었고 사회는 굉장히 혼란스러운데 빈에서 살롱 문화가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많이 사람이 저녁 때마다 살롱에 모여서 얘기하면서 문학과 과학, 의학, 경제학 등 다양한 학문이 발전한 기가 막힌 시대였다. 한국 사회가 지금 그렇게 할 준비가 지금 거의 됐다고 생각한다."

최 교수는 "한국은 지금 웬만한 분야에서 거의 세계 최고 수준에 다다랐다"며 "다만 구슬을 꿰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끝으로 '숙론'을 국회의원 전원에게 선물하고 싶다고도 했다. "대한민국에서 숙론을 제일 못하는 집단이 저 여의도에 있는 국회의원들이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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