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프리즘] 대전발 ‘전과 공시제’와 정권심판론

김방현 2024. 5. 8.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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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현 내셔널부장

도덕성은 정치인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으로 꼽힌다. 부도덕한 정치인이 권력을 잡았을 때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선거 때마다 후보자 도덕성은 중요한 검증 잣대였다. 가장 쉬운 도덕성 판단 근거는 전과(前科) 여부다. 정치권도 공직선거법 등을 통해 후보자 전과기록 공개를 강화해 왔다.

가장 눈에 띈 것은 2014년 공직선거법 개정이다. 당시 공직선거법은 범죄 종류와 상관없이 벌금 100만원 이상의 형을 받으면 전과를 선거 공보물 등에 공개하도록 바뀌었다. 또 실효(失效)된 형도 전과 기록에 포함했다. 종전까지는 전과 기록 공개 범위를 금고 이상 형을 받거나 선거법, 정치자금법, 직무상 뇌물죄 등 특정범죄에 한해 100만원 이상의 형을 받은 범죄 경력으로 제한했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국민의힘 후보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허리 숙여 사죄 인사를 하고 있다. [뉴스1]

흥미로운 것은 이때 공직선거법이 바뀐 게 대전 정치판에서 촉발됐다는 점이다. 대전시장과 19대 국회의원 등을 지낸 박성효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이사장은 2010년부터 수년간 국회 대정부 질문 등을 통해 “정치 선진화를 위해서는 후보자 개인, 제도, 민도 등 3가지 기본 요소를 갖춰야 한다”라며 “제도나 민도는 올라가는데 후보 자질 검증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면서 그는 “선거법에서 금고 이상의 형이 아니면 공보물 등에 전과 없음으로 나온다”며 “범죄의 90% 이상이 벌금형 이하일 것인데 전과를 감추면서 표를 달라는 것은 정치선진화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으니 ‘전과 공시제(公示制)’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주장에 새누리당(국민의힘)이 호응, 선거법 개정에 이르렀다고 한다. 박 이사장이 이런 문제 의식을 갖게 된 것은 2006년과 2010년 대전시장 선거에 나온 일부 후보의 전과 기록이 제대로 공개되지 않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시 대전시장 선거전에서 전과 기록 공개를 놓고 후보 간 난타전이 전개됐다.

그런데 이런 정치권의 도덕성 강화 노력은 지난 4월 10일 총선을 계기로 물거품이 된 느낌이다. 각종 범죄 혐의나 전과 여부가 당락에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해서다. 전과 경력이 있는 거대 야당 대표는 여러 혐의로 법정에 드나들고 제2야당(조국혁신당) 대표는 선거 전에 2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또 12석을 얻은 제2야당엔 형사 사건 피고·피의자가 수두룩하다. 전과가 사실상 만천하에 공개된 상황이었지만, 국민은 개의치 않았다. 이렇게 된 데는 윤석열 정권과 여당인 국민의힘 책임이 크다. 집권 세력은 총선에서 ‘정권심판론’이 다른 모든 이슈를 삼키도록 방치한거나 마찬가지였다. 정권심판론은 대개 정권 말기에나 통했지만, 이번에는 신기하게도 정권 2년 차에 태풍처럼 몰려와 국민의 도덕성 잣대까지 망가뜨렸다. 앞으로 회복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국가적 퇴보가 아닐 수 없다.

김방현 내셔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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