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을 것인가, 입을 것인가, 노브라의 문제

이예지 2024. 5. 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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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의 ‘노브라’는 여성들에게 ‘브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가? 노브라와 언더붑, 인조 젖꼭지를 내장한 니플 브라 사이에서 누군가는 속옷을 벗어 던지고, 누군가는 숨기려 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드러내려 한다. 벗을 것인가, 입을 것인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노브라를 향한 뜨겁고도 무성한 소문에 대하여.

‘오늘은 입을까?’ 매일 집 밖을 나서기 전에 당면하는 고민이다. 지금 걸친 옷과 몸 사이에 한 겹의 레이어를 더할까 말까. 옛날에는 고민도 하지 않았다. 10대 시절에는 잠을 잘 때도 브라를 했다. 친구들과 목욕탕에 가면 너도나도 브라 자국이 빨갛게 남아 있었다. 서로의 브라 사이즈를 물으며 A는 B를, B는 C를 부러워하곤 했다. 내 걱정은 브라가 불편하다는 것보다는 내 가슴이 너무 작다는 데 있었다. 언젠가 밤에는 브라를 벗고 잔다는 선배를 만났던 날의 충격을 기억한다. “그래도 돼요?” 나는 물었고 “한 번만 벗고 자봐. 다시 못 돌아간다니까.” 선배는 속삭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남들 몰래 속옷을 벗어두고 침대 안에 숨어들었다. 가슴이 사방으로 자유롭게 퍼뜨려지던 그 간지러운 자유를 기억한다.

나는 내 작은 가슴을 싫어했다. 누군가 좋은 대학과 큰 집과 비싼 차를 갈망하는 것처럼 나는 크고 풍만한 가슴을 갈망했다. 고개를 숙이면 발가락 끝이 보일 듯 말 듯하고, 뛸 때마다 가슴이 털럭거려 부담스럽고, 가슴 때문에 옷을 입을 때마다 본새가 안 나고, 가만히 있어도 어깨가 앞으로 숙여질 만큼 뻐근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가슴은 우리 집 족보에도 없었다. 대대로 엄마와 이모와 외할머니가 줄줄이 큰 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을 껴안을 때마다 가장 먼저 나에게 마중 나오는 듯한 그 풍만한 가슴이 나는 무척 좋았다. 도대체 왜 나에게 그 좋은 것을 물려주지 않았냐고 여러 번 따져 물었다. “지금이라도 가져가라, 얘” 하며 큰 가슴이 얼마나 살기에 걸리적거리고 불편한지 늘어놓은 것도 그들이었다. 나는 그 모든 기쁨과 슬픔을 빠짐없이 받고 싶었다.

삶이 기쁠 때나 슬플 때 나는 가슴 수술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1천만원이라고 들었고, 강남에 누가 잘한댔고, 유방암에 걸린다고 했고, 모유가 나오지 않는다고 했고, 누우면 국그릇 두 개 엎어놓은 것 같다고 했고, 누구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했다. 하지만 내 인생은 몸을 자본화할 정도로 넉넉했던 적 없었고, 생각보다 먹고살 만했다. 작은 가슴에 대한 슬픔은 여전했지만, 또 만성적인 것이어서 비염처럼 그럭저럭 끼고 살기 괜찮았다. 첫인상은 별로지만 계속 같이 있다 보니 뭐 그렇게 또 썩 나쁘지만은 않은 친구, 딱 그 정도였다. 그래 나도 네가 취향이 아닐 뿐, 너도 너대로의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내 20대의 가슴과의 대화는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가슴이 문제는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게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특별한 깨달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자세히 뜯어보니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라는 걸 발견했던 탓이다. 보자 하니 허리가 통짜인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뱃살도 삐쭉 튀어나왔고, 팔뚝 살도 두꺼웠고… 뭐 하나 썩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지우개로 지웠다가 다시 그릴 수 있다고 해도 한참은 걸릴 것 같았다. 지난 세월의 흔적은 내 서랍장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가슴 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구입한 몇십만원짜리 보정 속옷, 두꺼운 패딩이 들어간 브라들부터 없는 가슴골까지 만들어주는 푸시업 브라까지. 그로부터 15년이 흘렀다. 페미니즘의 바람이 불었고, 도시 한복판에서 상체 탈의 시위가 진행되기도 했다. 나와 내 꼭지는 얼마나 자유로워졌을까?

달라진 게 없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브라를 안 하고 다니는 존재가 추가됐다. 시장은 새로운 수요자를 인식했고, 새로운 속옷이 등장했다. 비쩍 마른 몸에 글래머러스한 가슴을 가진 비현실적인 모델들이 푸시업 레이스 브라를 입고 침대에 누워 있는 광고들 옆에 통통하고 둥근, 다양하고 친근한 몸매의 여자들이 투명한 얼굴로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광고들이 들어섰다. 와이어 없는 브라, 패드가 얇아진 브라, 젖꼭지를 가리는 니플 패치들, 몇 년 전까지는 이 나라에서 존재하지 않던 물건들이 생겼다.

브라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다양해졌다. 해방됐다기보다는, ‘예-’에서 ‘아니오-’ 사이에 ‘네니오’가 생긴 느낌이다. 누군가는 여전히 브라를 벗지 못한다. 속옷을 벗어 던지고 싶다는 메시지는 새롭지 않지만, “내 상체에 대해 다른 어떤 성별과도 같이 그저 무관심해달라”는 메시지는 여전히 새롭다. 꼭지는 여전히 내 몸에서 가장 화제의 분야다. 셀러브리티로서 관심을 끌고 싶다면 꼭지 컨트롤은 핵심이다. 여전히 많은 언론이 속옷을 입었냐 벗었냐로 수많은 기사를 쓴다. 댓글에는 “작네”, “벗어봤자 볼 것도 없네”, “예쁜 애들이 벗었으면 좋겠다” 하는 식의 성희롱 발언이 줄을 잇는다. 그런 시선과 평가, 조롱에도 노브라를 선택하는 여성들은 ‘어떤 여성’으로 특정화된다. 몸의 자유를 누리고 싶은 개인이기보다 문제적이고 반사회적인 페미니스트로 낙인된다. ‘노브라로 학교 갔다가 망신당한 20대 학부모 사연’, ’노브라로 산책하는 여대생 유튜버’가 버젓이 기사 제목에 오르고 “남성의 젖꼭지는 아무 느낌이 없지만 여성의 젖꼭지는 흥분됩니다”라는 댓글이 아무렇지 않게 추천에 오른다.

그리고 바야흐로 언더붑이 패션계의 트렌드로 번진다. 파격적인 옷차림으로 화제를 모으며 누구보다도 해방된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카니예 웨스트의 아내 비앙카 센소리는 역설적으로 누구보다 강압적인 환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셀렙 킴 카다시안은 자신이 운영하는 속옷 브랜드 ‘스킴스’에서 니플 브라를 선보인다. 노브라 ‘효과’를 내기 위한 브라로, 인조 젖꼭지를 내장한 보정 속옷을 출시한 것이다. 킴 카다시안은 “전 지구적 과제인 지구온난화에 대해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는다”며 이 브라를 두고 “아무리 더워도 항상 추워 보일 것”이고 “때로는 힘들겠지만 이 도드라진 부분은 단단할 것이며, 빙하와 다르게 솟아 나온 부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근래 이것보다 웃긴 농담을 발견하지 못했다.

내 몸의 5%도 안 되는 면적의 어떤 것에 대해 모두가 열띤 논쟁을 벌인다. 어떤 것은 되고, 어떤 것은 안 된다. 누군가는 숨기려 하고, 누군가는 드러내려 하고, 누군가는 강조하려 한다. 나 스스로에게 묻기도 이전에 많은 이야기가 날아든다. 몸은 이러한 암묵적이고도 엄격한 사회적 기준을 매 순간 학습한다. 그때그때 조금씩 변화하는 트렌드에 따라 어떤 것이 예외적으로 허용되고 이벤트화되는지도 기민하게 파악한다. 어떤 선택도 메시지가 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다. 자유는 더욱 복잡한 맥락 안에 놓인다. 어쩌면 전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어지럽지만 또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기분이다. 꼭지에 대한 소문은 더욱 무성해져야 한다. 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편하기 때문에 노브라를 선택하는 이들 또한 왜곡돼선 안 된다. 노브라를 둘러싼 이 무성한 소문은 더 시끄럽고, 방대하고, 두터워져야 한다. 그 이야기가 누구에게도 재미가 없어질 때까지. 노브라 효과를 내는 브라를 넘어 노브라 효과를 내는 브라의 효과를 내는 브라도 환영할 생각이다. 푸시업 브라도, 노 패드 브라도, 노브라도, 노브라 브라도 모두에게 나른한 무관심을 받게 되는 그날까지 꼭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마음은 더 단단해질 것이다.

Writer 양다솔 수필을 쓴다. 저서로 〈적당한 실례〉 〈아무튼, 친구〉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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