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시혁 ‘플랫폼 제국’ 꿈꿨지만…

배준희 매경이코노미 기자(bjh0413@mk.co.kr) 2024. 5. 7.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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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반목…‘사일로’ 전락한 멀티 레이블
지나친 분권·CEO 과신 빚어낸 합작품

‘뉴진스’ 소속사 어도어 민희진 대표와 하이브 간 갈등이 악화 일로를 걷는 가운데, 멀티 레이블 시스템이 경영 시험대에 섰다. 수평적 다각화 기반 멀티 레이블 시스템 구축은 유니버설뮤직 등 세계 유수 엔터 기업의 성장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어도어와 극심한 내홍으로 영역 불문 ‘IP 플랫폼 제국’을 일구겠다는 방시혁 이사회 의장의 초반 구상에도 흠이 갔다. 전문가들은 하이브가 멀티 레이블 고도화를 이루기까지 험로를 거칠 것으로 보고 있다.

멀티 레이블은 무엇

M&A 기반 수평적 다각화

멀티 레이블 전략은 독립적인 IP 기반 자회사를 선단식으로 여럿 두는 방식이다. 제조업에 비유하자면 여러 자동차 브랜드를 인수한 뒤 경쟁과 내부 자원 활용을 통한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전략과 비슷하다. 지난 수년간 세계 음반 시장에서는 인수합병을 통한 수평적 다각화로 시장 집중화가 가팔랐고 그 결과 유니버설뮤직 같은 초거대 엔터 플랫폼 기업이 탄생했다.

멀티 레이블 체제 강점은 명확하다. 정체성이 겹치지 않고 상호 독립적인 여러 아티스트가 동시다발적으로 활동하므로 경영진 입장에서는 손익 통제력을 확보할 수 있다. 특정 아티스트의 군입대 등에 따른 매출 공백이 발생할 우려를 낮출 수 있어서다. 개별 레이블에서 상호 경쟁하며 각자 아티스트를 키워내는 만큼 양질의 IP를 다수 확보할 수도 있다. 앨범 출시 주기도 짧아진다. 정규 앨범보다 미니 앨범 위주로 활동하는 최근 엔터 업계 트렌드가 이런 예다.

과거에는 멀티 레이블 시스템 정착이 쉽지 않았다. 이수만(SM), 양현석(YG), 박진영(JYP) 등 영향력 강한 아티스트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는 형식적으로 멀티 레이블 체제를 도입해도 정체성이 중복되지 않고 상호 독립적인 IP 양성이 힘들었다. 제한된 시장 규모도 걸림돌로 작용했다. 국내로 국한된 시장 규모에서는 멀티 레이블 체제로 여러 아티스트를 배출하더라도 점유율 출혈 경쟁과 ‘카니발라이제이션(제 살 깎기)’ 등 부작용만 반복됐다.

BTS 출현 등으로 K팝 시장 외연이 대폭 확장되면서 제대로 된 멀티 레이블 시스템을 시도할 만한 여건이 마련됐다는 게 다수 전문가 시각이다. 그 중심에 BTS라는 슈퍼스타를 앞세운 하이브가 있다는 데 이견이 없다. 상장으로 조달한 막강한 자본력을 지렛대 삼아 하이브는 국내외 엔터 시장에서 공격적인 다각화로 ‘범위의 경제(Economies of Scope)’ 구현을 노렸다. 기존 레이블 지분 매입과 신규 레이블 설립, 지분 투자 등이 숨 가쁘게 이뤄졌다. 세부적으로 ‘방탄소년단’은 빅히트뮤직, ‘세븐틴’은 플레디스, ‘르세라핌’은 쏘스뮤직, ‘뉴진스’는 어도어에 각각 속해 있다. 하이브는 미국·일본 아티스트용 레이블도 따로 뒀다. 세계적인 가수 아리아나 그란데와 저스틴 비버가 소속된 이타카홀딩스도 하이브 완전 자회사 하이브아메리카 소속이다.

집권 vs 분권 딜레마

레이블 간 반목 속출

이번 양측 갈등은 멀티 레이블 전략의 ‘맹점(盲點·Blind Spot)’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게 전문가 시각이다.

첫째, 집권과 분권의 딜레마다. 전자는 수직적, 중앙집권적인 구조다. 대부분 국내 대기업집단이 여기에 속한다. 후자는 수평적, 분권형 구조다. 이 가운데 멀티 레이블 체제에서는 분권형 구조 접목이 필수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창의적인 IP를 생산해야 하는 엔터 산업 특성상 자회사 격 레이블에 일정 수준 독립성을 주고 자율 경영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서로 중복되지 않으면서 독창적인 IP를 생산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또, 트렌드 변화 속도가 빠른 엔터산업 특성상 분권 경영을 통해 자율성을 확보한 뒤 각자 영역에서 사업 기회 포착 등 신속한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하이브-어도어 관계는 집권 기능은 아예 실종됐고 분권 정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지적이 비등하다. 일각에서 이번 사태를 두고 카카오 ‘닮은 꼴’ 평가를 내놓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카카오 역시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리는 과정에서 분권 경영의 극단으로 치달아 데이터센터 화재, 카카오톡 장애, 공정위 공시 누락, 카카오페이 경영진 스톡옵션 매각 사태 등 여러 폐단을 초래했단 지적이 쏟아졌다.

이번 사태 핵심 원인으로 꼽힌 어도어 이사회가 단적인 예로 지목된다. 상식적으로 하이브가 보유한 어도어 지분(80%)은 결코 경영권이 흔들릴 수준으로 볼 수 없다. 상법상 일반 결의는 물론 정관 변경까지 쥐락펴락할 수 있다. 문제는 이사회다. 현재 어도어 이사진에는 하이브 핵심 관계자가 전무하다. 민희진 ‘측근’으로 채워진 이사회만으로는 이사진에 대한 감시·견제 기능을 기대하기 힘들다. 대기업 계열사 사내이사는 “통상 자회사에 기타비상무이사 등으로 이사회에 진입해 모기업 지배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정 인물 측근으로만 이사회를 꾸리도록 둔 건 이례적”이라 평가한다.

결국 엔터 산업 특성상 일정 수준 자율 경영 보장이 필수적이지만 지나친 분권 경영이 작금의 부작용을 초래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가령, 통제력 상실에 따른 전사적인 자원 활용의 비효율, 분권화된 조직의 미흡한 경영 역량에 따른 효율성 상실, 부분 최적화와 부분 이기주의 등이 학계에서 꼽는 지나친 분권화의 폐해다.

분권에 따른 대표적 폐단이 ‘사일로 현상(Silo Effect)’ 심화다. 사일로는 세계적인 마케팅 구루 데이비드 아커 교수가 급격한 분권화의 폐단으로 꼽으면서 주목받았다. 사일로의 사전적 의미는 곡식을 저장해두는 원통형 창고다. 경영학계에서는 조직 내 부서 간 장벽이나 부서 이기주의를 뜻한다. 사일로 현상의 폐단 중 하나가 조직 혹은 부서 간 ‘단절(Disconnected)’이다. 분권 구조 아래 개별 조직 간 과도한 경쟁으로 상호 연결을 거부하는 현상이 속출한다는 것. 이 과정에서 비효율성, 자원 소모, 브랜드 이미지 훼손 등이 초래된다고 아커 교수 등은 지적한다.

어도어 뉴진스와 빌리프랩 소속 걸그룹 아일릿을 두고 상호 베끼기 논란이 빚어진 게 단적인 예다. 민희진 대표는 아일릿을 ‘뉴진스 아류’라고 표현하며 “아일릿은 연예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뉴진스를 카피하고 있다”며 날 선 공세를 편다. 이에, 아일릿의 비주얼 디렉터가 ‘손가락 욕’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등 멀티 레이블 간 반목과 대립이 여과 없이 노출됐다는 지적이다.

방시혁 하이브 이사회 의장. (연합뉴스)
毒 된 CEO 과신

지배구조 재정비 갈급

전문가들은 엔터 산업에서 다른 업종보다 과신형(Overconfidence) CEO가 두드러지는 특징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과신은 경영자에게서 가장 빈번하게 목격되는 인지적 편향(Cognitive Bias)이다. 학계에서는 크게 정확도 과신(Miscalibration·Overprecision), 우월감(Overplacement), 과대평가(Overestimation) 등이 과신의 범주에 속한다고 본다. 정확도 과신은 스스로의 신념에 관해 과도한 확실성을 갖는 것을, 우월감은 특정 개인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믿는 경향을, 과대평가는 스스로 능력의 절대적 수준에 대해 지나치게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을 각각 뜻한다.

엔터 업계에서는 민희진 대표는 물론 방시혁 의장 등을 두고 전형적인 과신형 CEO라는 평가를 내놓는 경우가 다수다. 익명을 원한 엔터 업종 애널리스트는 “민희진 대표를 알거나 같이 일했던 사람들은 ‘혼자 일하는 데 최적화된 사람’이라고 입을 모은다”며 “리스크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고 리턴에 대한 옵션만 쥐고 있는 포지션인데, 풋옵션 배수로 30배를 요구했다는 점은 본인 역량에 대한 확증 편향이 아니고는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라고 지적한다.

또 다른 엔터 업계 관계자는 “공정 단계별로 기여도가 구분되는 제조업과 달리, 엔터 업종 경영자는 최종 제품에 해당하는 IP 생산의 거의 모든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므로 다른 업종보다 유독 CEO의 과신을 통제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어도어 이사회를 민희진 측근으로만 꾸리도록 그대로 둔 것을 보면 방시혁 의장 역시 주주간계약 등으로 충분히 민 대표를 직간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는 촌평을 내놨다.

물론 과신형 CEO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CEO의 과신이 조직에 미치는 영향이 복합적이라는 게 여러 실증연구 결과다. 과신형 CEO는 미래 성장동력 확보와 혁신 활동에 그렇지 않은 CEO보다 적극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존재한다. 반면, 과신형 CEO들이 스스로의 판단에 지나친 확신을 가져 전략적 오판을 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연구도 다수다.

종합하면 CEO의 과신은 조직이 처한 전략적 상황에 따라 때로는 독이 되기도, 약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과신을 무조건 배척하거나 억제하려는 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게 전문가 견해다. 단, 조직에서 CEO의 과신을 조절할 수 있는 메커니즘은 꼭 구축해둘 필요가 있다. 가령, 멀티 레이블 등 여러 계열사와 모기업 간 느슨한 연결에 기반한 협의체를 두고 시너지와 리스크를 상시 조율·통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경영자 과신을 조절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계열사 전체를 아우르는 의사 결정 체계에 각 CEO 평가·통제 기능이 구조적으로 밀접하게 통합돼 있다면 이를 통해 과신형 CEO의 인지적 편향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번 사태 역시 어도어 이사회가 측근 인사로 채워져 CEO 감시·견제 기능이 무력화됐고 종국에는 특유의 과신을 제어하는 데 실패해 갈등이 증폭됐다는 게 다수 전문가 시각이다.

박지원 하이브 대표는 “이번 사안을 통해 (멀티 레이블 사업 방식에)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라며 “이번 사안을 잘 마무리 짓고 멀티 레이블의 고도화를 위해 어떤 점들을 보완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겠다”고 밝혔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8호 (2024.05.08~2024.05.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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