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여성을 만나다

천일홍 2024. 5. 7. 10:3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영덕, 곡성, 논산, 거제도까지, 바다를 헤치고 밭을 일구고 소와 닭을 기르며 땀 흘려 일하는 5명의 여성을 만났다. 도시에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근사한 일과 일상에 대하여.
해녀&크리에이터 진소희
육지에선 햇살처럼 웃는 소녀, 바닷속에서는 인어처럼 유영하는 9년 차 해녀. ‘거제도 최연소 해녀’라는 칭호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최고령 해녀로 불리는 날까지 바다의 품에 안길 예정이다.

거제시 덕포해변에는 ‘요즘 해녀’라고 불리는 젊은 여성이 있다 “오늘은 돌멍게를 많이 잡았어요.” 항구 앞에 멍게와 해삼 등 직접 잡은 해산물을 보란 듯이 쌓아두고 시원시원하게 웃는 그녀. “바닷속에도 계절이 보이는 거 아세요? 오늘은 빨간 멍게들이 장미꽃처럼 펴서 꽃밭처럼 보이더라고요. 어찌나 예쁘던지, 봄이 오려나 봐요.” 이름은 진소희, 스물세 살의 나이에 거제도 최연소 해녀로 물질을 시작해 현재는 자타 공인 거제시에서 가장 질 좋은 해산물을 많이 잡기로 소문난 9년 차 베테랑 해녀다. “처음부터 해녀를 꿈꾼 건 아니에요. 부산에서 나고 자랐고, 2016년에 우연찮게 거제도에 왔는데 중년의 해녀들을 보고 홀딱 반했지 뭐예요. 모두 바다에서 자신만의 싸움을 하고, 육지에서는 근사한 여성이더라고요. 그때 결심했죠. 나도 저런 해녀가 되겠다고.” 그는 결심과 함께 매일 출근하듯 해녀들을 쫓아다녔다. “물질하느라 힘드실 테니 요깃거리도 사다드리고, 애교도 부리면서 그렇게 이모들과 인연을 텄죠. 여전히 감사한 건 해녀들이 생업인 귀한 기술을 친절하게 전수해줬다는 거예요.” 하지만 물질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해녀복을 입고 벗는 법부터 몸무게에 맞는 잠수를 위한 납 무게 선정 등은 물론, 바닷속에서 해산물을 찾는 ‘눈’은 경험과 비례했다. “첫 1년은 정말 힘들었어요. 깊이 잠수할수록 느껴지는 수압은 고통스러웠고, 체력 소모도 심해 몇 달 만에 7kg이나 빠지더라고요. 새삼 해녀 이모들이 영웅처럼 느껴졌죠.” 하지만 진소희는 포기하지 않았다. 부족한 노하우는 해녀 선배들 곁에서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하나둘 익혔고, 물질에 도움이 될 거란 생각에 프리다이빙과 스쿠버다이빙 자격증도 땄다. “그렇게 만 1년이 지나니 저도 이모들 못지않게 해산물을 잘 따게 됐어요. 해산물별로 어떤 지형에 숨어 있는지 보이기 시작했고요. 그렇게 바닷속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데, 얼마나 신나던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물질에 매진했어요.” 직접 잡은 해산물을 해녀 위판장을 거치지 않고 직접 판매하는 구조도 만들었다. “거제도에 저희가 잡은 해산물의 질이 좋다는 소문이 나서 직접 찾아오는 거래처들이 생겼거든요. 여러모로 좋죠. 유통사에 휘둘리지 않고 저희가 정직하게 판매할 수 있고요.” 또한 ‘요즘 해녀’답게 SNS를 통해 직접 소통하며 판매도 하고, 구독자 약 4만4000명을 거느린 유튜버이기도 하다. “유명해지고 싶은 이유 중 하나는 해녀로 일하며 바다 환경오염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기 때문이에요. 몇 년간 잡히는 해산물이 달라지는 걸 보며 기후변화의 심각성도 느끼고요. 저희는 물질할 때 쓰레기가 보이면 꼭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작은 일부터 실천하고 있어요. 저는 이 일이 너무 좋거든요. 최연소 해녀로 시작한 만큼 최고령 해녀가 되고 싶은데, 그러려면 바다도 건강해야 하니까요.” 진소희의 목표는 뭘까? “가족이자 해녀 동료 진정민 언니와 함께 ‘요즘 해녀’를 멋진 브랜드로 성장시키는 거예요. 물속에서 영상을 찍어 유튜버가 된 것처럼 ‘요즘 해녀’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해녀라는 직업이 얼마나 근사한지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죠.”

‘소언니농장’ 대표 김보라
3년 전 곡성으로 귀농해 번식우 농장을 창농하며 매일 소에게 밥을 먹이고, 보듬으며 근사한 하루하루를 만드는 ‘소언니농장’의 대표이자, 〈소밥주는언니〉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버.

“먼 길 오셨네요. 시골이라 한적하고 좋죠? 영화 〈곡성〉과는 다르게 고즈넉한 동네예요. 하하하.” 전라남도 곡성에서 번식소 농장을 운영하는 김보라 대표는 〈소밥주는언니〉라는 그의 유튜브 채널명처럼 호쾌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나저나 도시적인 블랙 레더 재킷에 몸에 착 붙는 상의를 입고 소밥을 주는 언니라니. 어쩐지 낯설지만 “평소에도 이렇게 입고 농장에 일하러 와요.(웃음)”라는 그의 너스레와 지난해 2월 MBC 〈생방송 오늘 저녁〉에 출연해 짧은 데님 쇼츠에 롱부츠를 신고 소를 자식처럼 아끼며 여물을 주던 장면을 나란히 떠올리면 자연스러운 일상인 듯했다. “제가 경기도 부천에서 나고 자랐거든요. 도시 여잔데, 시골에 살아도 멋을 포기할 순 없죠.(웃음)” 김보라 대표가 연고도 없는 곡성에서 소 농장을 운영하게 된 이유는 뭘까? “도시에 살 때는 주변이 시끄러운 게 당연하잖아요. 그러다 결혼을 하고 남편과 한적한 삶을 꿈꾸게 됐어요. 결국 ‘조용한 시골에서 소 키우며 살자!’ 결심하고 이곳으로 내려오게 됐죠. 그렇게 김보라 대표는 약 3년 전, 남편과 함께 번식우를 키우는 ‘소언니농장’을 창농하게 됐다. “농장 규모는 약 1000평이에요. 그중 축사는 500평쯤 되고요. 소는 70두 정도 키우고 있는데, 규모에 비해 소의 수는 적은 편이에요. 번식우 농장이라 한 울타리에 어미 소와 송아지가 함께 있는 경우도 잦은데, 가능한 한 넓은 공간을 만들어줘야 모두 건강할 것 같아 소의 수를 무작정 늘리지 않으려고 해요.” 매일 소에게 밥을 주고, 도시처럼 경쟁이 심하지 않은 곳에서 지내는 그에게 시골 생활은 상상했던 것과 같을까? “시골에서 한적하게 사는 건 좋죠. 하지만 농장을 운영하는 건 예상보다 훨씬 힘들더라고요. 엄마로서 애들 키우는 것도 보통이 아니잖아요. 주말에는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소를 굶길 순 없으니 꿋꿋하게 일어나 농장으로 향해요.” 그런 김보라 대표에게 귀농하고 싶다 말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전할 조언이 있는지 묻자 알찬 답변이 돌아왔다. “장점이라면 청년 농업인은 국가 차원에서 혜택이 많다는 거예요. 좋은 조건의 대출 상품도 있고, 지원도 받을 수 있죠. 사업적 관점에서 보면 장점이 꽤 있어요. 단점이라면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서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이 펼쳐질 거예요. 단적인 예로, 저는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데, 아이를 키우기에 시골은 도시만큼 편리하지 않아요. 소아과 병원도 서울에 비해 훨씬 적으니까요. 그래서 종종 귀농하고 싶다는 사람을 만나면 꼼꼼히 고민해보고, 단박에 시골에 오는 것보다 간접적으로 먼저 경험을 해보고 결정하면 좋겠다고 조언해요.” 그가 더 바랄 게 있을까? “소 농장 일만큼 유튜브도 열심히 해보려고 해요. 저처럼 귀농을 꿈꾸는 이들에게 시골살이의 매력을 더 알리고 싶거든요. 소 농장 대표로서는 물론이고 유튜버로서도 열심히 할 거예요. 〈소밥주는언니〉의 주인장으로서, ‘소언니농장’의 대표로서 성실하게!”

‘아침에계란’ 대표 손다원
자연 양계 농원 ‘아침에계란’ 대표. 17년 차 아침에계란은 ‘달걀계의 에르메스’라 불리며, 3000마리의 닭과 건강한 내일을 그린다. 좋은 식재료를 제공한다는 자부심을 느끼며.

“고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였어요. 아버지가 한 TV 프로그램에 나온 자연 양계 농업자를 보더니 그러시더라고요. ‘너랑 잘 맞을 것 같은데, 닭 키워볼래?’” 그렇게 열아홉 살이던 손다원은 경북 영덕에 자연 양계 농원 ‘아침에계란’을 열었다. 하지만 손다원 대표가 창농하기로 결심한 양계장은 당시만 해도 국내 1%에 못 미치는 자연 양계 농원이었다. “자연 양계 농원의 기준이 까다로워 만만치 않았어요. 인간의 이익을 위해 계란만 낳는 공장이 아니라 닭에게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고, 닭장의 크기도 넓어야 하고, 닭들이 뛰놀 방목장도 있어야 해요. 하지만, 제 결심의 이유는 단순했어요. 사람들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하고 싶었고, 그 달걀을 낳는 닭들도 행복하면 좋겠다는 마음.” 당시는 지금보다 자연 양계가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던 때라 손다원 대표는 일본에서 발행된 관련 서적을 번역해 읽으며 아버지와 함께 닭장을 짓고 자연 양계 농원을 시작했다. 하지만 힘든 일은 따로 있었다. “처음 영덕에 농원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데, 젊은 사람이 시골에 와서 농업을 하겠다고 하니 동네 사람들 중 ‘너 공부 되게 못했구나?’라는 말을 한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 무지한 편견과 다르게 손다원 대표는 사업가로서 기세가 남달랐다. “사업 초반에 농업 선배들에게 유통비용을 줄이기 위해 소비자와 직접 거래하면 좋다는 조언을 듣고 무작정 아파트 단지에 찾아가 가가호호 계란 판촉도 했어요.” 그렇게 맛은 물론 환경까지 고려한 아침에계란은 입소문을 탔고, 창농 당시 200마리던 닭의 수는 이제 약 3000마리가 됐다. 그뿐만 아니다. 이제 약 3주 치 주문이 밀린 걸출한 브랜드이자, 건강한 모이를 먹고 넓은 방목장을 뛰놀며 자유롭게 자란 닭이 낳은 달걀이라며 소비자들이 ‘달걀계의 에르메스’라는 별명도 붙였다. 정기 배송을 신청한 회원도 셀 수 없다. “저희 회원 중 암 투병 환우도 꽤 있어요. 엄선된 먹거리를 드셔야 하는데, 저희 계란이 적합하다고 판단하셨대요.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농업인이 됐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껴요.” 손다원 대표는 자연 양계 농원에 대한 공부를 이어가고자 경북대학교 농산업학과에 20학번으로 입학했다. 그렇게 사업과 학업을 병행하는 바쁜 나날 중 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그는 만삭의 몸으로 4시간 통학 거리를 열심히 차로 달렸고, 출산한 후에는 유모차를 끌고 가 수업을 들었다. 그의 학구열은 띠동갑 동생인 동기들의 젊음만큼 뜨거웠고, 장학금을 세 곳에서 받는 우수한 학생으로 올해 초 졸업장을 받았다. 이제는 다시 본업에 집중해야 할 때. “올해 아침에계란 2호점 오픈을 준비하고 있어요. 위치는 제가 사랑하는 이곳 영덕이 될 거예요. 소규모 농업인으로서 매일 다른 걱정이 생기곤 하지만, 저는 자연 양계 농업이 더 널리 알려져 건강한 식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길 바라요.”

‘따울농장’ 대표 김지수, 김지운
스물셋, 스물다섯. 자매인 두 대표가 ‘따울농장’을 창농한 나이다. 이제 600평이 넘는 딸기 재배동에서 1년에 5톤 이상의 프리미엄 딸기를 수확하는 어엿한 농장주가 됐다.

“여기는 ‘따울농장’이에요. 딸기의 충청도 방언인 따울을 브랜드명 삼아 로컬 푸드점은 물론 백화점에도 납품하는 프리미엄 딸기를 재배하고 있어요.(김지운)” 연고 없는 충남 논산에 딸기 농장을 차린 20대 자매가 있다. “저는 스물다섯에, 동생 지운이는 스물세 살에 이 농장을 차렸고 이제 3년 차가 됐어요(김지수).” 서울과 바짝 붙어 있는 도시, 경기도 광명에서 자란 두 여성이 시골에 내려와 딸기 농장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뭘까? “제가 한국농수산대학을 나왔거든요. 졸업하자마자 창농했어요. 이곳에 온 이유는 논산에 딸기 농가가 많아서예요. 인근 농업기술센터에서 관련 교육도 들을 수 있고, 잘하는 선배 농장에 찾아가 멘토처럼 따라다니며 배우기도 했어요.(김지운)” “지운이는 어렸을 때부터 제 앞가림 똑 부러지게 하는 친구였는데, 중학생 때부터 부모님께 농사를 짓겠다고 하더니 정말 해내더라고요. 저는 지운이가 막 창농했을 때부터 함께했고요(김지수).” 두 자매가 딸기 농장을 선택한 건 이유가 있다. “청년 농업인은 정부의 지원 사업도 꽤 있고, 몇몇 조건이 맞으면 국가에서 저금리 대출도 받을 수 있거든요. 블루오션이다 싶었죠.(김지운)” “동생이 창농했대서 와봤더니 딸기는 고소득 작물이기도 하고, 사업적으로 보면 웬만한 회사원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겠다 싶었어요. 여러모로 젊은 사람들에게 귀농을 추천하고 싶어요. 하지만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김태리처럼 아름다운 삶이라 생각하면 안 돼요. 농사는 만만한 게 아니거든요.(김지수)” 농대를 나온 김지운 대표와 똑소리 나는 김지수 대표가 합심해 시작했지만, 농사일은 만만치 않았다. “딸기는 이른 아침에 재배해야 하거든요. 온도가 높지 않을 때 따야 무르지 않은 딸기를 수확할 수 있어 보통 새벽 4시에 일을 시작해요. 그리고 농사는 퇴근이 없는 기분이에요. 계속 할 일이 생기거든요.(김지운)” 그렇게 두 자매는 흙을 친구 삼아, 딸기를 가족 삼아 비닐하우스 앞에 컨테이너 집을 꾸렸다. 노동보다 괴로운 순간도 있었다. 처음 농장을 차렸을 때는 농장에 찾아온 인근 어르신들로부터 “여자들이 결혼이나 하지 뭐하러 여기 와서 고생하니?”라는 어처구니없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지역사회인 만큼 두 자매는 다툼보다는 화합을 선택했고, 3년간 정진했다. 덕분에 지금은 220평에 달하는 딸기 재배동을 3개나 운영 중이고, 올해는 1000평에 달하는 육묘동도 지어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다. “환경문제로 인한 이상기후 때문에 딸기묘가 죽는 사례가 더 자주 생긴다고 해요. 그래서 딸기묘가 너무 비싸지거나 부족해서 심지 못하는 농부들도 늘고 있어요. 저희가 준비하는 딸기 육묘 사업은 ‘스마트팜’이에요. 육묘가 잘 자랄 수 있도록 환경을 세밀하게 구성할 계획이에요. 이상기후에 휘둘리지 않고 육묘를 키울 수 있으면 가격을 안정화하는 데 일조할 수 있고, 더 많은 농가에 정직한 가격으로 제공하고자 해요.” 두 자매의 꿈은 뭘까? “저희 ‘따울’을 브랜드로 성장시키고 싶어요. 저탄소 인증을 받으려 노력 중인데, 더욱 친환경적인 딸기를 재배해 소비자들이 믿고 사 먹을 수 있는 브랜드가 되길 바라요.”

Copyright © 코스모폴리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