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홀로 나간지 8년…27세 예나씨의 쓸쓸한 죽음 [소외된 자립청년]

정세희, 김서원, 박종서 2024. 5. 7.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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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립준비청년

「 보호자가 없거나 양육을 포기해 아동복지시설·그룹홈·위탁가정에서 성장한 뒤 만 18세가 되어 홀로서기를 시작한 청년. 보호종료 이후 5년간 정착지원금 및 자립수당 등 정부 지원을 받는다. 정부는 2019년 1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립준비청년이 20명이라고 집계했다. 하지만 정부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 청년들의 죽음은 훨씬 더 많았다.



지난 4월 10일 故 유예나(27·가명)씨 49재 때 놓여진 음식과 꽃다발. 독자 제공
지난 2월 22일 보육원을 떠난지 8년 된 자립준비청년 유예나(27·가명)씨가 충북 제천에서 숨졌다. 유씨는 숨지기 직전 ‘Don’t think you’re alone’(혼자라고 생각말기-김보경)를 들었다.

“지치지 않기, 포기하지 않기. 어떤 힘든 일에도 늘 이기기. 너무 힘들 땐 너무 지칠 땐 내가 너의 뒤에서 나의 등을 내줄게.”

노래 가사와는 달리 마지막 순간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씨 휴대전화 재생 목록엔 ‘눈사태 난 듯 무너진 맘 추스려 보니 다시 불 꺼진 밤…여긴 춥다, 너무 춥다. 손을 모아 입김 불어봐도. 마음이 얼어붙어서’란 내용이 담긴 ‘춥다(에픽하이)’도 있었다.

유씨가 함께 생활하던 조모(29·여)씨에게 전화를 걸어 “난 이제 여기까지인 것 같아. 미안하고 고마워, 잘 살아”라고 한 게 유언이 됐다.


3년 전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다


예나씨 집에서 발견된 자필 메모. Home is wherever I'm with you (당신과 함께 하는 곳이 어디든 집이야)이라고 적혀있다. 박종서 기자
유씨는 보육원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있었다.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다른 친구들은 고아원 창립자 성을 따라 이름을 지었지만 유씨는 아버지의 성을 따랐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던 2015년엔 아버지와 연락도 닿았다. 그때부터 아버지 유씨는 매달 50만원씩 용돈도 보내줬다. 신인성 고아권익연대 정책국장은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보육원 안에선 일종의 권력과도 같다”며 “부모가 없다는 게 가장 서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유씨는 하지만 3년 전인 2021년 아버지가 친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을 입양한 양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양아버지 유씨는 “널 생각하는 마음은 변함없다”고 달래봤지만, 예나씨는 친부모와 양부모에게 두 번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이틀간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 충격으로 유씨는 가족 얘기가 나오면 유독 우울해했다고 한다. 유씨가 생전 종종 낙서했던 공책에는 “Home is wherever I’m with you(너와 함께 하는 곳이 어디든 집이야)”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부모가 없거나 양육이 어려워 보육원 등 복지시설에 맡겨진 뒤 만 18세가 되어 떠난 자립준비청년은 2023년 기준 1635명. 정부는 이들에게 1회 자립정착 지원금(지역별로 1000만~2000만원)과 5년간 자립수당(매달 50만원)을 지원한다. 목돈을 가진 소년들이 전세·중고거래 등 각종 사기를 치는 하이에나의 먹잇감이 되는 일도 잦다. 대부분 지인이나 가족 등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범죄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9년 이래 홀로서기를 준비하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20명을 포함해 자립준비청년 32명이 사망했다. 유씨의 죽음은 자립수당 제도 도입 전인 2017년 보호가 종료돼 관리 대상에 들지 않아 통계에도 남지 않았다. 보건복지부가 행정시스템상 집계가 가능한 ‘자립수당 받는 기간(보호종료 5년 이내) 중 극단 선택’만 집계·관리하고 있어서다. 유씨 외에도 2021년과 2023년 같은 보육원 출신 각각 만 24세와 30세인 자립준비청년 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통계엔 기록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유씨와 달리 창립자를 따라 성이 같았다.

연도별 보호종료 청소년 인원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2023년 국회입법조사처 조사]


자립 준비를 위해 발버둥 친 시간


지난해 3월, 예나씨가 제주도 여행 당시 아쿠아리움에서 찍은 사진. 독자 제공
예나씨 공책에 쓰여진 가게 확장에 대한 메모. 박종서기자
극단적 선택 전까지 유씨는 구김살 없이 밝은 사람이었다고 주변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2016년 보육원에서 나올 때 유씨에겐 디딤돌씨앗 통장에 든 2000만원만이 전부였다. 정부 정착지원금 500만원과 시설 입소 이후 모은 후원금을 합한 돈이었다. 하지만 유씨는 고깃집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고 하며 공부해 2018년 2월 강원도의 한 전문대 카지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엔 인근 리조트에 정규직으로 취업했다. 리조트에서 만난 동료들은 그를 “시원시원한 성격에 똑 부러지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새벽 5시 30분부터 오후 3시, 오후 3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교대해가며 일하는 게 쉽진 않았지만 5년간 성실히 일했다. 지난해 8월부턴 조씨와 함께 치킨집 사업을 시작했고 장사가 잘돼 확장·이전 계획도 세웠다. 직접 튀긴 닭 10마리를 들고 보육원도 찾아 교사에게 “그동안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누구도 예상 못한 유씨의 죽음에 보육원 동생 백씨는 “단지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시설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기댈 수 있는 어른은 단 한 명도 없었다”며 “홀로 서야 했지만 사회는 무관심했다”고 말했다.


보호기간 5년의 함정


김경진 기자
자립청년들 사이에선 준비기간 5년이 끝난 친구들의 부고가 부쩍 늘었다고 입을 모았다. 자립수당 지급뿐만 아니라 각종 자립프로그램 지원 등 사회의 관심이 준비기간 5년이 지나면 끊어지고 그야말로 홀로 남겨지기 때문이다.

자립준비청년 지원 커뮤니티(SOL)를 운영하는 윤도현씨는 “지난 2월에만 (자립 청년의) 부고 소식을 두 번이나 접했다. 특히 명절이나 크리스마스 전후 사망 소식이 많이 들려온다”고 전했다. 조윤환 고아권익연대 회장은 “같은 보육원 출신 80명 중 성인 된 이후 20명이 사망한 경우도 있다”며 “알려지지 않은 죽음은 훨씬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주우진 자립준비청년협회장은 “현행 보호종료 후 5년간의 획일적인 지원·관리로는 자립을 위한 장기적인 비전을 갖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일반적인 청년들이 그러하듯 중간에 진로가 바뀌거나 경제적 형편이 달라질 수 있는데 이럴 경우 무방비 상태가 된다”면서 “보호종료 5년 이후에도 현금을 지원해달라는 게 아니라 다양한 사례를 고려한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자립청년의 현실을 반영해 보호종료 5년 이후에도 사망자 통계를 집계하는 등 보완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정세희·김서원·박종서 기자 jeong.sae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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