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제국·교회의 심장 콘스탄티노플, 무슬림에 넘어가다

신상목 2024. 5. 7.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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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세계 교회사
1453년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는 오스만 군대의 모습. 국민일보DB


373년 5월 2일 ‘정교회의 아버지’로 불리는 교부 아타나시우스가 별세했다. 그는 325년 니케아공의회에 참석했고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된 후 아리우스주의와 싸워 승리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성경 정경의 목록을 최초로 작성하기도 했다. 4세기 교회를 이끈 위대한 교부 중 한 명이었다.

1559년 5월 2일 존 녹스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그는 격렬한 설교와 신앙의 힘으로 성도들을 고무했다. 또 메리 여왕을 ‘새 이세벨’이라 부르며 불같은 설교를 퍼부었다. 스코틀랜드 개혁은 교육에 강조를 두었다. 모든 교구에서 젊은이들에게 경건 훈련을 시켰고 주요 도시에는 대학이 설립됐다.

1813년 5월 5일 기독교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그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단독자(單獨者)로서의 신을 탐구하는 종교적 실존의 존재 방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불렀다. 그의 명성은 현대 기독교 사상과 실존 사상의 선구자로서 알려졌다. 1995년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교도’ 중 한 명이다.

요하네스 브람스


1833년 5월 7일 독일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요하네스 브람스가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낭만주의 시대에 고전파 음악의 전통을 지켜 독자적 작풍을 견지했다. 신앙심이 두터운 개신교 신자였던 그는 종교적이면서도 죽음의 예감이 감도는 장중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으며 특히 만년에 발표한 성악곡에는 이런 곡들이 많았다.

엘리사 호프만


찬송가 작사가인 엘리사 호프만 목사가 1839년 5월 7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목회하면서 틈틈이 찬송가를 작사해 2000여편의 찬송을 남겼다. 지금도 그중 50여편이 불리고 있으며 한국교회 21세기 찬송가에는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250장)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259장) ‘주님 주실 화평’(327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337장)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405장) 등 5곡이 수록됐다.

노리치의 줄리안


1373년 5월 8일 영국의 신비주의자 노리치의 줄리안이 깊은 병고 중에 16번의 계시를 받았다. 그의 계시 내용과 묵상을 담은 저서는 ‘신성한 사랑의 계시’로 흑사병과 전쟁이 휩쓸던 중세의 한복판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긍정적 비전과 영적 개혁을 실천했다. 그녀는 어둠과 고통을 긍정하고 자연과 인간의 선함 속에서 자비롭고 너그럽고 인자한 그리스도를 찬양했다. “그리스도는 기꺼이 내어주시는 분이다” “너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도 나에게는 불가능하지 않다 나는 모든 사물에 대해 약속을 지킨다 나는 모든 것이 확실히 잘되도록 할 것이다” “기도는 똑바로 팔을 뻗고 하나님에게 진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등의 말로 유명하다.

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


1760년 5월 9일 모라비안 형제회의 창시자이자 에큐메니즘과 선교 사역의 선구자인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폰 진젠도르프 백작이 독일 헤른후트에서 별세했다. 개신교 선교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가 사망할 때까지만 해도 수백 명에 불과했던 모라비안 형제단은 전 세계에 226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진젠도르프는 19세 때 이탈리아의 화가 도메니코 페티의 작품 ‘에케 호모(Ecce Homo·이 사람을 보라)’에 묘사된 예수 수난 장면(요 19:5)의 그림을 보고 평생 주님의 십자가와 동행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진젠도르프가 이 그림 앞에 섰을 때 ‘나는 너를 위해 이 일을 했건만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하려느냐’는 음성이 들렸다 한다.

1983년 5월 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명의 과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163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고문의 위협을 받고 태양 중심 우주에 대한 견해를 철회하도록 강요당했을 때 교회의 손에 의해 겪었던 고통에 대해 사과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가 이 문제를 다시 검토할 것을 지시했고 결국 1992년 갈릴레오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정죄가 철회되었다.

칼 바르트


1886년 5월 10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이자 신학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파시즘(특히 히틀러 치하)에 반대했던 칼 바르트가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났다. 대작 ‘교회 교의학’을 비롯해 ‘로마서 주석’ 등으로 유명하며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놀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인 마이클 리브스는 그에 대해 “신정통주의나 혹은 그와 같은 꼬리표가 붙어 다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꼬리표들은 정확하지 않을뿐더러 별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1265년 5월 15일 ‘신곡’의 저자이자 시인, 정치가인 단테 알리기에리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단테는 죽기 직전 ‘신곡’을 완성했고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325년 5월 20일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에게 종속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단 아리우스주의를 논의하기 위해 비티니아의 니케아(현 이즈닉)에서 최초의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소집했다. 공의회는 아리우스(아리우스주의의 창시자)를 파문하고 그의 모든 책을 불태우라고 명령함으로써 격렬한 갈등을 해결하려 했지만 갈등은 수십 년 동안 계속됐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누스가 324년 도시를 세운 이래 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메흐메드 2세에 의해 함락되면서 비잔틴 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이후 무슬림들은 도시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꿨으며 도시를 장식하던 화려한 교회당인 아야 소피아를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했다.

1578년 5월 31일 이탈리아 고고학자 안토니오 보시오가 로마에서 카타콤을 발견했다. 일부 사람들은 카타콤을 피난처나 예배 장소로 착각했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주로 매장실로 사용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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