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이재명 대표의 영수회담 자세 유감
도대체 왜 만났을까? 얼마 전 있었던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 간 이른바 영수회담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지난 2년간 만남을 회피했던 윤 대통령이 자리를 마련한 건 선거 참패를 겪고 난 후 불통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대표 역시 ‘피의자’가 아니라 야당 대표로 대통령에게 당당하게 인정받고, 또한 총선에서 승리한 장수로서 힘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회담에서 내가 궁금해하며 주목했던 건 이재명 대표였다. 이 대표는 오래전부터 영수회담을 갖자고 제안해 왔고, 그 자리에서도 “여기 오는 데 700일이나 걸렸다”는 말까지 했다. 그렇게 기다린 만큼 영수회담에서는 그동안 이 대표가 보여줬던 것과는 뭔가 결이 다른, 말 그대로 ‘영수(領袖)’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회의에서 이 대표가 보여준 모습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영수회담에서 미리 준비해 간 A4 10장 분량의 원고를 읽었는데, 형식도 내용도 영수회담의 수준에는 맞지 않았다. 대통령을 만나자고 해 놓고 거기서 자기의 지지층을 향해 연설한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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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리 준비한 원고 읽었던 이 대표
대통령 앞에서 지지층 향해 연설
통큰 자세 기대했으나 기대 미흡
독주·불통의 경고, 야당에도 해당
」
영수회담을 두고 권위주의 시대의 소산이니 시대착오적이니 하는 말도 있지만, 어느 조직에서나 최고 지도자는 주변의 의견이 분분한 난제에 대해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리이다. 그런 점에서 ‘영수’가 만나는 것은 각 당이나 진영 내부의 반대나 단기적 이해관계를 넘어 큰 틀에서 막힌 문제를 풀어내기 위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이들이 실무선에서 합의가 어려운 문제를 두 사람이 만나 해결해 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그동안 해 왔던 주장을 반복하거나 지지층의 목소리를 전달하려고 한다면 대변인 성명이면 될 일이지 영수가 굳이 만나 할 행동은 아니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회담을 보면서 이 대표가 작게 느껴졌다. 총선 승리가 사법 리스크를 없애 주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 승리와 함께 이 대표는 차기 대권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거기에 맞는 격을 기대했는데 크게 미치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이 선거에서 크게 승리했지만 사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대표로서는 우려할 만한 점도 적지 않다. 특히 당의 전통적 기반인 호남에서 민주당은 조국혁신당에 밀렸다. 거대 정당이 유리한 선거제도의 특성으로 인해 지역구에서는 민주당이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비례대표 투표에서는 조국혁신당에 이어 2위에 그쳤다. 민주당은 광주에서 36.3% 대 47.7%로, 전남에서는 39.4% 대 44.0%로, 그리고 전북에서는 37.6% 대 45.5%로 조국혁신당에 뒤졌다.
더욱이 총선 이후에 실시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를 보면, 호남 지역에서 민주당 선호도는 51%였지만, 이 대표 선호도는 37%에 그쳤다. 총선을 승리로 이끈 직후의 조사임에도 불구하고 이 대표에 대한 선호는 민주당과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선거 민심이 ‘윤석열이 싫다’고 생각한 건 맞지만 그게 꼭 이재명 대표가 좋다는 뜻으로 보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총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 대표 역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국민은 권력의 독주나 일방적인 국정 운영을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총선이야말로 대통령이 독주하고 불통하는 데 대한 심판이었다. 그런데 이런 정서는 국회를 장악하게 된 야당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민주당이 거대 의석의 힘만 믿고 독주하면, 이번 선거에서 윤 대통령에게 가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오만함을 국민이 느끼게 될 것이다. 대통령 선거는 3년이나 남았지만 보궐선거는 당장 내년이라도 실시될 가능성이 있고, 그 결과는 작년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처럼 정치적 파문을 불러올 것이다. 이번에는 윤 대통령이 심판의 대상이었지만 그때는 민주당이나 이 대표가 될 수도 있다. 권력이 주어졌을 때의 신중함과 사려 깊은 판단이 중요한 것이다.
이번 총선은 민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권력자가 깨닫게 해 준 기회였지만, 정치제도적으로 보면 대통령과 의회라는 두 개의 권력이 충돌할 수 있는 대통령제의 가장 나쁜 상황이 생긴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정치학자 린즈(Linz)는 대통령과 의회 간 대립과 갈등을 대통령제의 위험으로 간주하면서 이것이 정치체제의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진단이 바로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이런 제도상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여야 최고 지도자 간의 타협과 합의이다. 영수회담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번 회담은 몹시 서툴고 어색하게 진행되었지만, 그래도 또 만나야 하고, 만난다면 영수회담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격조와 정치력을 보여야 한다. 또 만나면 이번보다는 좀 나아지지 않을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일이니까.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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