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에케 호모, 보라 이 사람이로다”

신상목 2024. 5. 6.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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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더미션입니다. 어린이날에 이어 오늘도 부슬부슬 비가 내립니다. 연휴는 잘 보내고 계신지요.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고 밝고 안전하게 자라기를 바래봅니다. 무엇보다 어린이를 사랑하셨던 주님의 품 안에서 언제나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우리 모두 어린아이이지요.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올 수 없다고 하신 주님의 경고를 살피면서 언제나 겸손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더미션에는 어린이 주일 등 각 교회 표정을 담았습니다. 이번 한 주는 가정의 달을 맞아 ‘가족을 위한 기도문’도 게재합니다. 함께 읽고 기도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기도문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내용이 참 신선합니다. 일반적인 기도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표현이 나옵니다. ‘새로고침하게 하소서’입니다. 우리 가정에 새로고침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에는 중요 인물이 많이 등장합니다. 영국 노리치 지방의 여수사로 살았던 줄리안과 그의 긍정과 기쁨의 신앙, 근대 개신교 선교의 문을 연 진젠도르프 백작 그리고 그의 회심의 계기가 된 ‘에케 호모’(이 사람을 보라) 그림 이야기는 놀랍습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호프만 목사는 찬송을 작사하면서 그 예수를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분으로 썼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놀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는 평을 듣는 신학자 카를 바르트 등도 소개되니 천천히 읽어주세요.

1638년 5월 6일 로마 가톨릭교회의 개혁 운동에 영감을 준 네덜란드 신학자 코넬리우스 얀센이 사망합니다. 얀센은 예수회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 반대하며 교회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거부할 수 없는 은총의 교리를 재발견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은혜와 예정에 대한 그의 견해 때문에 얀센의 가르침을 금지했습니다.

요하네스 브람스 탄생
1833년 5월 7일 독일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요하네스 브람스가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종교심이 강했던 그는 교회를 위해 많은 작품을 썼습니다. ‘독일 레퀴엠’의 성서 본문을 직접 편집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낭만주의 시대에 고전파 음악의 전통을 지켜 독자적 작풍을 견지했습니다. 브람스의 작품에서는 호화로운 색채 감각은 찾아볼 수 없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는 신앙심이 두터운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종교적이면서도 죽음의 예감이 감도는 장중한 작품들이 많으며, 특히 만년에 발표한 성악곡에는 이러한 것들이 많습니다. R. 슈트라우스, A. 드보르자크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작사가, 엘리사 호프만
1839년 5월 7일 찬송가 작곡가이자 목사인 엘리사 A. 호프만이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작사곡으로는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250장)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259장) ‘주님 주실 화평’(327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337장)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405장) 등이 있습니다.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하고 1868년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목회하면서 틈틈이 찬송가를 작사해 2000여편의 찬송을 남겼습니다. 지금도 그중 50여편이 불리고 있으며 한국교회 21세기 찬송가에는 5곡이 수록돼 있습니다.

정이 많았던 호프만 목사는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친구였습니다. 설교를 준비하지 않을 때는 소외된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합니다. 1876년 그에게 큰 아픔이 찾아왔습니다. 결혼한 지 10년 만에 아내가 어린 아들 3형제를 남겨두고 하늘나라에 먼저 간 것입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외로워하던 호프만 목사는 십자가 보혈을 묵상하다가 복음을 새롭게 체험하게 됩니다. 호프만 목사는 십자가 보혈로 자신이 죄 사함을 받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 것을 깨닫고 환희와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는 이 감격과 기쁨으로 시를 지었습니다. 그 시가 찬송가 250장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입니다.

절망 속에서 희망 계시를 듣다…노리치의 줄리안
1373년 5월 8일 영국의 신비주의자 노리치의 줄리안은 깊은 병고 중에 16번의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20년 후 자신의 저서 ‘신성한 사랑의 계시’에 자신의 환상과 그에 대한 묵상을 기록했습니다. 줄리안은 흑사병과 전쟁이 휩쓸던 중세의 한복판에서 놀라울 정도로 긍정적 비전과 영적 개혁을 실천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어둠과 고통을 긍정하고 자연과 인간의 선함 속에서 자비롭고 너그럽고 인자한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줄리안은 교회 옆 암자에 혼자 기거하면서 자발적으로 여수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암자의 작은 창문을 통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지혜와 조언을 구하면 자문하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 줄리안은 병으로 죽음에 직면했는데 병을 앓으면서 일련의 환상과 계시를 체험합니다. ‘신성한 사랑의 계시’는 여성이 영어로 쓴 최초의 신앙서적으로 알려집니다.

그녀는 여러 차례 환상을 보았음에도 자신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동체 일원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의 환상과 계시의 내용이 소위 ‘직통계시’라기보다는 보편적 계시, 즉 성경적 진리에 입각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계시의 내용은 성경 내용을 반영하며 매우 긍정적이고 밝습니다. 그가 남긴 어록 중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의 빛나는 아름다움은 우리의 죽어가는 살(肉) 속에 감춰어져 있다.”
“그리스도는 기꺼이 내어주시는 분이다.”
“모든 것이 잘될 거야. 모든 것이 잘될 거야. 확실히 모든 것이 잘될 거야”
“너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도 나에게는 불가능하지 않다. 나는 모든 사물에 대해 약속을 지킨다. 나는 모든 것이 확실히 잘되도록 할 것이다.”
“기도는 똑바로 팔을 뻗고 하나님에게 진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바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외경이 가득하다면 우리는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노리치 마을 주민 절반이 흑사병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전염병이 가축을 덮쳤고 농사도 흉년이었습니다. 절망에 사로잡힌 주민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교회나 수도원을 약탈하기도 했습니다. 줄리안은 당시 절망적 상황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느끼며 질병을 동경하기도 했습니다. 병을 통해 타인들의 고통을 더 잘 알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국제적십자사, YMCA 창립자
1828년 5월 8일 적십자 및 기독교청년회 창립자인 앙리 뒤낭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납니다. 1901년 최초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합니다. 뒤낭은 부모의 영향을 받아 청소년기부터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힘썼는데 특히 제네바의 빈민촌을 찾아가 봉사 활동을 했으며 친구들을 모아 빈민구호단체를 결성했습니다. 이 단체는 1852년 11월 3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창설된 기독교청년회, 즉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로 발전했습니다.

솔페리노의 격전에서 발생한 수만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를 목격하면서 부상자 구호에 참가했으며 이때 그의 인생이 사업가에서 사회활동가로 뒤바뀌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는 전시의 부상자 구호를 위한 중립적 민간 국제기구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이 제안은 유럽 각국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아 1863년 국제 적십자(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 ICRC)가 창립됐습니다. 이듬해엔 유럽 16개국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적십자(제네바)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전쟁터에서 부상자를 돌보는 것은 적군도 아군도 아니며 이들의 활동을 방해나 공격해서도 안 되고 중립성을 인정한다는 내용을 명문화하고, 흰 바탕에 붉은색 십자가를 새겨넣은 상징을 표시하도록 했습니다.

1915년 5월 8일 미국 최초의 흑인 군목이었던 헨리 맥닐 터너가 온타리오주 윈저에서 미국의 인종 차별에 분노하며 세상을 떠납니다. “하나님은 흑인이다”라는 그의 발언으로 많은 사람이 그를 ‘흑인 신학’의 선구자로 여깁니다.

개신교 근대 선교의 문을 연 진젠도르프 백작
1760년 5월 9일 모라비안 형제회의 창시자이자 에큐메니즘과 선교 사역의 선구자인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폰 진젠도르프 백작이 독일 헤른후트에서 별세합니다. 그가 사망할 때까지만 해도 수백 명에 불과했던 모라비안 형제단은 전 세계에 226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진젠도르프는 19세에 뒤셀도르프에서 이탈리아의 화가 도메니코 페티의 작품 ‘에케 호모(Ecce Homo·이 사람을 보라)’에 묘사된 예수 수난 장면의 그림을 보고 평생 주님의 십자가와 동행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에케 호모는 요한복음 19장 5절에서 총독 빌라도가 가시면류관을 쓴 채 자신 앞에 끌려 온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한 말입니다. 우리말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보라 이 사람이로다”(Here is the man)라고 번역돼 있습니다.

도메니코 페티의 ‘에케 호모(Ecce Homo·이 사람을 보라).

진젠도르프가 이 그림 앞에 섰을 때 음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 일을 했건만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하려느냐.’ 그 음성은 한 청년의 인생을 180도 변화시켰습니다. 그렇게 개신교 근대 선교의 새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그의 선교는 헤른후트(영어로는 모라비안) 공동체에서 기원합니다. 헤른후트란 ‘주님이 보호하시는 곳’이란 뜻입니다. 몇몇 개신교 피난민들이 그의 사유지가 있던 베르텔스도르프에서 쉼터를 얻고자 했습니다. 베르텔스도르프는 헤른후트로 이름이 바뀝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나온 난민들이 도착했고 그의 사유지는 새로 지은 주택과 상점이 늘어나며 공동체 마을이 됩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727년 큰 신앙부흥이 일어납니다. 철야기도회가 시작됐고 일주일 내내 24시간 계속됐습니다. 이 기도의 전통은 100년이 넘도록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해외 선교를 나간 것은 진젠도르프가 한 연회에 참석했다가 그린란드 원주민과 서인도제도에서 온 아프리카인 노예를 알게 되면서였습니다.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그들의 호소에 진젠도르프는 세계 선교와 복음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됐습니다. 이후 최초의 헤른후트 선교사 2명이 버진아일랜드로 파송됐고 이후 20년간 헤른후트 공동체는 개신교 진영 전체가 지난 2세기 동안 파송한 선교사보다 더 많은 수의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진젠도르프가 파송한 선교사들은 신학자가 아니라 복음 전도자로 훈련받은 일반성도였습니다. 자기 힘으로 생계를 해결하는 기능공 노동자였습니다. 그들은 전도 대상자의 삶의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말뿐 아니라 모범적인 삶으로도 믿음을 증거했으며 언제나 그들보다 탁월한 자가 아니라 그들과 똑같은 사람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자 했습니다.

1983년 5월 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명의 과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163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고문의 위협을 받고 태양 중심 우주에 대한 견해를 철회하도록 강요당했을 때 교회의 손에 의해 겪었던 고통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가 이 문제를 다시 검토할 것을 지시했고 결국 1992년 갈릴레오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정죄가 철회되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지다, 카를 바르트 출생
1886년 5월 10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이자 신학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파시즘(특히 히틀러 치하)에 반대했던 카를 바르트가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납니다. 18세 때 당대 가장 유명했던 자유주의 신학자인 아돌프 하르낙과 빌헬름 헤르만 밑에서 수학했습니다. 이후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떠오르는 별로 각광을 받습니다.

제네바 개혁교회 부목사가 된 그는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 빠져들었고 칼뱅이 섰던 오래된 강단에서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자펜빌이라는 작은 마을 목사로 부임한 그는 자유주의신학과 결별합니다. 사람들에게 종교적이 되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자신의 자유주의신학 스승들이 독일의 전쟁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고 바르트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복음을 전적으로 문화에 동화시키는 모습에 자유주의 신학을 향해 가졌던 모든 신뢰가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점점 성경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묘한 신세계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전에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던 것처럼 로마서를 읽었습니다. ‘로마서 주석’을 쓰면서 그는 자유주의적 비평 방법을 버리고 축자적 영감 교리를 사용해 본문이 직접 말하도록 하기 원했습니다.

1921년 바르트는 괴팅겐대학 개혁신학 교수로 초빙됐고 자유주의신학과 싸울 인상적 신학적 무기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4년 뒤 안셀무스의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라는 금언으로부터 신학은 우리 자신의 독립적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믿음으로 사고하고 깨닫는 것임을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스위스 바젤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그는 ‘교회 교의학’을 집필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의 역작인 이 책은 성경론 신론 창조론 화해론 그리고 구속론으로 구성됐으나 구속론은 집필하지 못했습니다.

바르트의 공로는 슐라이어마허에서 시작해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 중심적이고 내재주의적인 신학을 시원하게 깨부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과에 대해선 평가가 쉽지 않습니다. 칼뱅주의자들은 그가 예정론을 비판하고 만인구원론과 유사한 화해론을 창안했다는 점에서 비판합니다. 다른 진영에서는 화해론을 극찬합니다. 성경의 영감에 대해서는 그가 역사 비평학을 수용했기에 구 프린스턴 신학자들에게 공격을 당합니다.

1962년 한 차례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가 발표한 저서들의 본질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답했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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