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공책을 들고 영화관에 가는 일

2024. 5. 6.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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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어 전주국제영화제에 와 있다.

또 내가 좋아하는 일은 공책과 볼펜을 들고 영화관에 가는 것이다.

영화관 바깥으로 빠져나와 공책을 펼치면 문장들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엉망으로 적혀 있지만 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적었는지 더듬거리며 재구성해 본다.

영화관에서 긴 영화를 보는 일이 과거의 일처럼 여겨지듯이, 공책과 펜으로 글을 쓰는 일 역시 점차 과거의 유산이 되어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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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오 시인


작년에 이어 전주국제영화제에 와 있다. 거리에 펼쳐진 늦봄의 날씨는 환하고 나른한데 상영관은 어둡고 쌀쌀해서 영화를 보고 바깥의 거리로 나오면 꿈에서 깨어나는 기분이 든다. 좋은 영화들을 많이 보았다. 나는 상영관이라는 공간에 속박되는 일을 즐긴다. 휴대폰도 켤 수 없고, 어둠 속에서 빛을 뿜어내는 스크린을 하염없이 바라보거나 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영화관 의자에 앉아 긴 러닝타임을 견디는 일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있다. 긴 영화를 보는 일은 깊은 물속에 몸을 푹 담그고 있는 일 같아서 영화로부터 빠져나온 뒤에는 몸의 전체가 퉁퉁 불어 있는 것처럼 낯선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잠깐 다른 몸이 되는 그 시간이 주는 해방감이 달갑다.

또 내가 좋아하는 일은 공책과 볼펜을 들고 영화관에 가는 것이다. 영화제 기간 동안에는 숙소에 짐을 다 내려두고 공책 한 권을 든 채 이 영화 저 영화를 보러 다닌다. 영화를 보다가 인상적인 장면이 나오거나 떠오르는 문장들이 있으면 어둠 속에서 공책을 펼치고 이 문장 저 문장 적어본다. 영화관 바깥으로 빠져나와 공책을 펼치면 문장들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엉망으로 적혀 있지만 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적었는지 더듬거리며 재구성해 본다. 영화를 보는 당시엔 빠르게 지나쳐버리고 말았을 순간들은 그 공간에서 꾸었던 꿈의 기록처럼 엉망인 필체로나마 공책에 남아 있다.

태블릿이나 노트북이 대중화되면서 손으로 직접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영화관에서 긴 영화를 보는 일이 과거의 일처럼 여겨지듯이, 공책과 펜으로 글을 쓰는 일 역시 점차 과거의 유산이 되어가는 것 같다. 긴 영화 속에 잠겨드는 일의 기쁨처럼 종이의 냄새와 촉감, 종이 위에서 사각거리는 펜 움직이는 소리, 그런 물성과 감각이 우리의 몸속에 오래오래 새겨진 채로 남기를 바란다.

김선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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