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 코리아] 기초학문 지원은 국가의 전략적 투자다

2024. 5. 6.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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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교무처장, 리셋 코리아 교육분과 위원

대학 사회가 전공 자율선택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시범적 도입이 아닌 대규모 확대여서 후폭풍이 예상된다. 전공 자율선택제란 1학년 때 다양한 학문과 전공을 탐색하고 2학년 이후 학과를 선택하는 제도다.

전공 선택권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우선 진로와 적성보다 점수에 맞춰 학과를 선택하는 학생이 많다. 이들은 학업에 흥미를 못 느끼고 중도 탈락하거나, 졸업 후 전공과 일자리의 불일치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 학습 낭비이고, 교육 손실이다. 제 돈 내고 다니는데 배울 학과를 선택 못 하고 전과(轉科)도 안 된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리는 학생도 있다. 특히 자기 주도적인 학생이라면 더 좌절한다. 무엇보다 바깥 사회는 탈경계, 융복합 시대로 나아가는데 대학은 ‘무(無)혁신 늪’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 자율전공 확대에 기초학문 위기
토대 약하면 첨단산업도 흔들려
공공재라는 인식 갖고 지원해야

급한 추진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자율전공 확대는 대학의 성찰에 기반한 ‘내적 동력’보다 정부 요구와 사회 요청에 따른 ‘외적 압력’으로 촉발됐다. 역사적으로 하향식, 외부 주도형 혁신은 현장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원래대로 돌아간 사례가 많다. 정책 불신도 문제다. 제도의 취지는 신입생 때 다양한 학문 생태계와 융복합 학습을 경험해서 종합적 사고, 통찰력, 문제 해결력을 키우고, 자기 이해와 진로 탐색을 바탕으로 학과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교수는 이를 구조 개혁으로 받아들인다.

대학의 준비도 따져볼 일이다. 자율전공 도입은 출발점이다. 다양한 진로 탐색과 맞춤형 상담이 따르지 않으면, ‘자율’은 무책임한 ‘방목’이 된다. 게다가 2학년부터 시작할 전공 과정이 폐쇄적이면 자율 효과는 반감된다. 대학 교육과정 전체를 손봐야 하는 이유다.

전국국공립대학교 인문대학장협의회와 전국사립대학교 인문대학장협의회가 지난 1월 24일 교육부의 무전공 입학생 확대 방침이 기초학문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며 추진 중단을 촉구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연합뉴스

더 큰 문제는 ‘학과 쏠림’이다. 충분한 정보와 상담이 없으면 학생들은 취업 전망이나 유행을 좇아 ‘인기 학과’에 몰리기 마련이다. 문·사·철(文史哲) 같은 기초학문은 존폐 기로를 맞을 수 있다. 고전을 통해 우리 사상·역사·문화를 배우는 한문학과는 8개 대학에만 남았다.

대부분 대학이 4월 말에 자율전공 도입을 포함한 대입 전형 계획을 제출했다. 총장의 치적이나 정부 사업 수주를 위한 포장이 아니길 바란다. 교육은 실험 대상이 아니고 한 학생의 삶이 달렸기 때문이다. 새 제도가 성공하려면 대학과 정부 모두 혁신해야 한다.

여러 분야를 접목한 융합 교육 플랫폼을 만들어 다양한 전공 수업을 접할 수 있게 하는 학과제 개편을 실시한 애리조나주립대의 사진이다. 사진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홈페이지

먼저 대학은 환경 변화를 직시해야 한다. 시대는 공급자 중심의 보호막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학생 관점에서 기존 대학 제도와 프로그램을 재설계할 때다. 도서관학과가 산업 변화와 학생의 요구를 받아들여 문헌정보학과·데이터사이언스학과로 변신한 것이 사례다. 애리조나주립대처럼 여러 분야를 접목한 융합 교육 플랫폼을 만들어 다양한 전공 수업을 접할 수 있게 하는 ‘학과제 개편’도 시도할 만하다. 물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도 배우게 해야 한다.

정부 역할도 중요하다. 재정 위기에 처한 대학이 비인기 학과 보호에 나서기 어렵다. 그렇다고 교육을 시장에만 맡겨둘 순 없는 노릇이다. 역사·언어·지리 같은 기초학문을 보자.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고 전승하는 일, 조상이 남긴 문헌을 고증하고 해석하는 일을 다른 나라 학자에게 부탁할 수는 없다. 나라에 그런 역량이 없으면 중국의 동북공정 같은 역사 왜곡에서 우리를 지켜내기 어렵다. 수학·물리·화학 같은 기초과학도 그렇다. 기초 토대가 취약하면, 인공지능·반도체·2차전지 같은 첨단산업의 경쟁력은 허상이 된다.

고등교육에서 기초학문은 의료 서비스에서 ‘필수 의료’와 같다. 국민 생명, 건강과 직결되는 필수 의료는 공공재이고 정부가 책임질 영역이다. 마찬가지로 기초학문 지원은 ‘시혜적 배려’가 아닌 ‘전략적 투자’이고 ‘국가 책무’이다.

‘대학이 학생을 뽑던 시대’에서 ‘학생이 대학을 선택하는 시대’가 됐다. 자율전공 도입은 시작에 불과하다. 좋은 교육은 그냥 오지 않는다. 정교한 시뮬레이션, 체계적 준비와 실천, 무엇보다 ‘학생 중심’으로 변하려는 의지가 요청된다. 융합 교육 토대를 만들고 창의 인재를 길러내는 것은 미래를 위한 최고 투자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교무처장, 리셋 코리아 교육분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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